경찰 마스코트 '포순이'가 성별 고정관념을 깨겠다며 치마를 벗고 바지를 입은 지 벌써 6년이다. 그럼에도 2026년 K-팝 무대에는 짧은 치마를 입고 '여성 경찰' 콘셉트를 연상시키는 걸그룹이 등장했다.
18일 아일릿 공식 유튜브 채널에 올라온 '체포하겠어' 챌린지 영상의 한 장면. ⓒ아일릿 유튜브 채널
걸그룹 아일릿(ILLIT)은 18일 일요일 공식 유튜브 채널에 신곡 '체포하겠어' 챌린지 영상을 공개했다. 영상 속 멤버들은 쓰고 있던 모자를 던진 뒤 두 다리를 흔드는 이른바 '개다리춤'을 추고, 목에 건 호루라기를 불었다. 마지막에는 총을 쏘는 듯한 동작으로 춤을 마무리했다.
앞서 아일릿은 17일 인천 인스파이어 아레나에서 열린 앙코르 콘서트에서 신곡 '체포하겠어'를 선공개했다. 멤버들은 경찰 제복을 변형한 유니폼에 짧은 스커트와 니삭스를 착용하고, 목에는 호루라기를 건 채 무대에 올랐다.
방시혁 하이브 의장은 해당 곡이 수록된 아일릿의 미니 5집 '브레이크 이븐(BREAK EVEN)' 전곡에 참여했다. 오는 26일 발매되는 'BREAK EVEN'은 손익분기점을 뜻하는 경영 용어에서 착안한 앨범이다. 자신이 쏟은 시간과 감정만큼 돌려받지 못하는 관계에 더는 매달리지 않겠다는 뜻을 담았다.
타이틀곡 '체포하겠어' 역시 애매한 친절로 마음을 흔든 상대에게 경고장을 날리고 관계의 주도권을 되찾겠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러나 정작 무대에는 짧은 치마에 니삭스를 신고 올라왔고, 이는 자연스럽게 여성 경찰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하지만 사랑 앞에서 주체성을 강조함에도 여성 경찰을 표현하는 방식은 낡은 성별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 아니냐는 비판의 목소리가 나왔다.
경찰청 마스코트 포돌이와 포순이. ⓒ경찰청 홈페이지
6년 전 경찰청의 선택은 정반대였다. 경찰청은 2020년 여성 경찰 마스코트 '포순이'의 치마를 벗기고 바지를 입혔다. 1999년 포순이 탄생 21년 만의 변화였다. 긴 속눈썹도 없앴고 단발머리가 귀 뒤로 넘어갔다. 여성 경찰을 치마와 속눈썹으로 구분하는 낡은 성별 고정관념을 깨기 위해서였다. 현장에서 뛰고 움직여야 하는 경찰 업무의 특성상 바지가 활동에 더 적합하다는 점에서도 의미 있는 변화였다. 포순이도 바지를 입는 시대에, 무대 위 여성 경찰 콘셉트로 나온 걸그룹은 짧은 치마을 입고 나온 셈이다.
특히 곡 전반에 반복되는 호루라기 소리를 두고 온라인에서는 "엑셀방송 같다"는 반응까지 나왔다. 여성 출연자들이 후원 경쟁에 참여하는 일부 인터넷 방송 특유의 분위기를 연상시킨다는 것이다. 이를 두고 이러한 비교야말로 여성 아이돌의 무대를 성적인 시선으로 해석하는 것이라는 반론도 나왔다.
일부 누리꾼은 일본 만화 '체포하겠어!'와의 유사성에도 주목했다. 후지시마 코스케가 1986년부터 1992년까지 연재한 이 작품은 여성 경찰관들의 활약을 그린 만화다. 신곡 제목이 해당 작품의 제목과 비슷하고 여성 경찰을 콘셉트로 내세웠다는 점에서 이를 참고한 것 아니냐는 추측이다.
여성 직업인을 둘러싼 성적 대상화 논란이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2020년 블랙핑크 멤버 제니는 '러브식 걸스(Lovesick Girls)' 뮤직비디오에서 짧고 몸에 밀착되는 간호사복에 하이힐을 신은 모습으로 등장했다. 당시 간호사의 직업적 이미지를 왜곡하고 성적 대상화했다는 비판이 일었고, 결국 YG엔터테인먼트는 해당 장면을 삭제했다.
K-팝 산업에서 여성 팬덤은 핵심 소비층이자 흥행을 뒷받침하는 중요한 기반이다. 아일릿 역시 여성 팬들의 지지가 두터운 그룹이다. 티켓 예매처 NOL에 따르면 지난 3월 열린 아일릿의 첫 투어 서울 공연에서 여성 예매자는 전체의 70.7%를 차지했다. 특히 20대 여성만 59.2%에 달했다. 여성 팬덤의 지지를 바탕으로 성장한 걸그룹이 여성 경찰을 짧은 치마와 니삭스로 재현했다는 점에서 제작진의 콘셉트 선택에 의문이 제기된다.
아이돌에게 콘셉트는 음악과 안무, 비주얼을 관통하며 그룹의 정체성을 만들고 팬덤을 형성하는 핵심 요소로 작용한다. 아일릿은 데뷔 초기부터 '마법소녀' 콘셉트를 그룹의 정체성으로 구축해 왔다. 리본과 프릴, 몽환적인 음악과 동화 같은 세계관을 결합해 현실과 판타지의 경계를 넘나드는 소녀들의 모습을 그렸다. 지난해 발매한 미니 3집 '밤(bomb)'에서는 평범한 소녀가 마법소녀로 변신하는 모습을 전면에 내세우기도 했다.
팬들 사이에서는 아일릿 특유의 몽환적이고 귀여운 콘셉트를 그리워하는 목소리도 존재한다. 데뷔곡 '마그네틱(Magnetic)'과 '체리쉬(Cherish)' 등에서 보여준 동화적이고 사랑스러운 분위기는 아일릿만의 차별화된 정체성으로 평가받았다. 그러나 최근 강한 비트와 반복적인 구호를 앞세운 음악으로 변화하면서 기존의 신비롭고 몽환적인 감성이 옅어졌다는 아쉬움도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