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정거래위원회(공정위)의 현장조사를 거부한 쿠팡의 태도부터 셀프주유소에서 소비자에게 추가 주유를 유도하는 정유사의 결제 방식까지, 올해 국정감사(국감)에서 여야 의원들이 드러낸 문제들이 눈길을 끌고 있다.
수조 원대 인공지능(AI) 사업의 의사결정 과정을 추궁하거나 정부가 지원한 고가의 AI 장비가 제대로 활용되지 않는 실태를 지적한 사례도 있었다. 여야의 충돌과 파행으로 얼룩진 국감에서도 민생과 정책의 허점을 파고들어 정부와 기업의 답변을 끌어낸 질의들이 주목받고 있다.
국회의사당 전경. ⓒ연합뉴스
18일 국정감사 진행 현황을 종합하면, 6일 시작된 올해 국감에서는 기업의 불공정 거래와 소비자 권익, AI 정책과 정부 예산 집행 등 다양한 분야에서 구체적 문제 제기가 이어졌다. 특히 국회 정무위원회(정무위)와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과방위)에서는 의원들의 질의가 기업의 개선 약속이나 정부의 정책 재검토 답변으로 이어지는 등 눈에 띄는 성과도 나타났다.
정무위 소속 민병덕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12일 공정위 국감에서 쿠팡의 현장조사 거부 문제를 정면으로 제기했다.
앞서 쿠팡은 대규모유통업법 위반 의혹과 관련한 공정위의 현장조사에 불응하고, 사전 통지 없는 조사의 적법성을 문제 삼으며 소송을 제기했다. 지난달 서울고등법원이 쿠팡의 집행정지 신청을 기각했지만, 공정위의 조사 권한을 둘러싼 논쟁은 국감장까지 이어졌다.
민병덕 의원은 "공정위의 법 집행을 무시하는 안하무인격 태도를 보이면 다른 유통사도 똑같은 태도를 보일 것이다"라며 국회 차원의 공동 대응을 촉구했다. 기업의 조사 거부가 반복될 경우 공정위의 법 집행 자체가 무력화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에 주병기 공정거래위원장은 사안을 상당히 무겁게 보고 있다며 조사 권한이 경제적 약자의 권익을 보호하기 위한 법 집행의 출발점이라고 강조했다. 유동수 정무위원장도 여야 간사에게 대응 방안 협의를 요청하고 필요시 입법 보완을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민 의원은 정유업계의 가격 담합 의혹과 불공정 거래 관행도 문제 삼았다. 공정위가 SK에너지와 HD현대오일뱅크의 가격 담합 혐의에 대한 심의에 착수하고 검찰도 두 회사를 관련 혐의로 재판에 넘긴 상황에서, 국제유가 불안이 정유사들의 부당이익으로 이어졌는지를 따져 물은 것이다.
민병덕 더불어민주당 의원. ⓒ연합뉴스
민 의원은 "국민은 생활비 부담, 국가는 경제 위기인데 이 정유 4사는 이 전쟁을 돈벌이 기회로 삼은 것이다"라고 질타했다. 특히 주유소가 특정 정유사의 제품만 구매하도록 하는 '전량 구매계약'과 제품을 공급한 뒤 가격을 확정하는 '사후 정산제'를 지적했다. 주유소가 저렴한 제품을 자유롭게 선택하기 어렵고 공급가격도 미리 알 수 없는 구조라는 것이다.
이에 정유사 경영진들은 유가 급등에 따른 국민 부담에 유감을 표하고 거래 관행을 개선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가격 담합 혐의에 대한 최종 판단은 공정위 심의와 재판 등을 통해 이뤄질 예정이다.
같은 위원회 소속 박준태 국민의힘 의원은 셀프주유소에서 소비자들이 무심코 지나칠 수 있는 결제 방식의 문제점을 짚어 정유사들의 개선 약속을 끌어냈다.
셀프주유소에서 '가득 주유'를 선택하면 연료가 거의 채워졌을 때 주유기가 자동으로 멈춘다. 그러나 일부 주유기 화면에는 '정액 마감'과 '정량 마감'이라는 선택지가 표시돼 금액이나 주유량의 끝자리를 맞추도록 추가 주유를 유도하는 방식이 적용돼 왔다. 실제로는 별도의 선택 없이 주유건을 거치대에 걸어도 이미 주유한 만큼만 정상 결제할 수 있지만, 이러한 종료 방법이 충분히 안내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박준태 국민의힘 의원. ⓒ연합뉴스
박준태 의원은 "넣은 만큼만 결제되는 시스템이 이미 갖춰져 있는데도 소비자에게 고지하지 않았다"고 지적하며 정유사들에 시정을 요구했다.
이에 김창수 GS칼텍스 부사장은 10일부터 국감 당일 오전까지 직영 셀프주유소의 시스템 개선을 100% 완료했다고 밝혔다. 김종화 SK에너지 대표도 올해 안에 관련 시스템을 개선하고 자영주유소까지 지원을 확대하겠다고 약속했다. 에쓰오일 역시 별도의 주유 종료 버튼을 도입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과방위에서는 이주희 민주당 의원이 정부가 지원한 고성능 그래픽처리장치(GPU)의 낮은 활용률을 지적하며 재배분 문제를 공론화했다.
GPU는 AI 모델을 학습하고 개발하는 데 필요한 핵심 장비다. 정부는 고가의 장비를 직접 확보하기 어려운 기업과 대학, 연구기관 등에 GPU를 지원해 왔다. 그러나 9월 기준 정부 지원 GPU의 월평균 활용률은 51.5%에 그쳤고, 활용률이 20% 이하인 기관도 16곳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주희 의원은 6일 과학기술정보통신부 국감에서 활용률이 낮은 기관에 장비를 계속 지원하는 것이 적절한지 따져 물으며 실제 사용 실적에 따른 재배분 필요성을 제기했다.
이에 배경훈 부총리 겸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은 최신 GPU를 지원받은 기관들이 장비에 적응하는 데 시간이 필요했다고 설명하면서도 "연속 2개월 이상 활용이 미흡할 경우 GPU를 회수해 재배분하는 방안도 고려하겠다"고 밝혔다.
이 의원은 AI를 활용해 해킹 취약점을 찾아내는 한국인터넷진흥원(KISA) 취약점관리센터의 내년도 운영 예산이 정부안에 반영되지 않은 문제도 지적했다. 해당 센터가 6월부터 약 3개월 동안 민간 정보통신시설과 소프트웨어 등에서 보안 취약점 523건을 발견했는데도 예산 확보에 실패했다는 것이다.
이주희 더불어민주당 의원. ⓒ연합뉴스
이 의원은 "기업 자체 점검만으로는 프론티어 AI급 수준의 AI에 의한 해킹 공격을 막기가 어렵다"며 정부의 상시 점검 확대를 요구했다. 배 부총리는 정부 재정 여건으로 예산이 반영되지 못했다면서도 국회와 협의해 예산 확보에 노력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같은 위원회 소속 박정하 국민의힘 의원은 정부의 약 4조6천억 원 규모 프론티어 AI 사업을 둘러싼 의사결정 과정을 집중적으로 추궁했다.
정부는 국내 기업들이 독자적 AI 모델을 개발하도록 지원하는 '독자 AI 파운데이션 모델(독파모)' 사업을 추진해 왔다. 여기에 세계 최상위 수준의 AI 모델을 확보하기 위한 별도의 대규모 투자 계획이 추가되면서 두 사업의 차별성과 정책 결정 과정에 대한 의문이 제기됐다.
박정하 국민의힘 의원. ⓒ연합뉴스
박정하 의원은 정부가 제출한 자료에 국가재정전략회의와 업무보고 내용만 담겨 있다는 점을 지적하며 "누가 어디서 어떻게 결정했는지 회의자료를 내놓으라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수조 원의 재정이 투입되는 사업인 만큼 누가 어떤 절차를 거쳐 사업을 추진하기로 결정했는지 구체적 근거를 제시해야 한다는 취지다.
오전 질의부터 재보충질의까지 추궁이 이어지자 배 부총리는 "프론티어 AI 모델에 대한 추진은 제가 발제를 했고 관련 재정당국, 청와대와 논의가 있었다"고 밝혔다. 대통령에게도 관련 내용을 보고했다고 답하면서 사업의 추진 경위가 보다 투명하게 드러났다.
올해 국감 전반부에는 이처럼 정쟁과 별개로 기업의 거래 관행을 따져 묻고 정부 정책의 결정 과정과 예산 집행 실태를 점검하는 질의도 이어졌다. 남은 국감과 후속 절차에서 여야 의원들이 제기한 문제들이 구체적 제도 개선으로 연결될 수 있을지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