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마뉘엘 마크롱은 2017년 프랑스를 바꾸겠다며 역대 최연소 대통령에 취임했다. 당시 39세였다. 기성 정치의 벽을 허물겠다고 약속했던 젊은 개혁가는 9년이 흐른 지금, 자신이 바꾸겠다던 기성 권력의 상징이 됐다.
프랑스를 바꾸라는 요구는 이제 대통령 자신을 향하고 있다. 퇴임까지 약 7개월을 남겨둔 마크롱 대통령이 마주한 프랑스는 말 그대로 불타고 있다.
10월17일(현지시각) 프랑스 리옹에서 생활비 상승에 항의하고 학생들의 요구에 연대하는 시위가 열린 가운데, 한 시위 참가자가 불타는 관광안내소 앞에서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의 사진과 단두대가 그려진 피켓을 들고 있다. ⓒAP/연합뉴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는 19일(현지시각) '폭동 이후 정치적 격랑에 직면한 마크롱'이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프랑스 전역을 휩쓴 폭력 사태가 마크롱 대통령의 정치적 위기로 번지고 있다고 보도했다.
FT는 특히 마크롱 대통령의 지지율이 약 15% 수준까지 떨어졌다고 전했다. 시위 발생 전 실시된 입소스(Ipsos) 여론조사에서 마크롱의 지지율은 2017년 취임 이후 최저 수준으로 추락했고, 세바스티앵 르코르뉘 총리 역시 22%에 머물렀다.
이번 폭동은 이미 여러 악재에 허덕이고 있던 마크롱 정부에 또 하나의 치명타가 됐다. 세바스티앵 르코르뉘 총리가 이끄는 정부는 예산안 처리를 둘러싼 정치권의 대립과 금융시장 불안에 시달리고 있었다.
여기에 교육 여건 개선을 요구하는 고등학생들의 시위가 수주째 이어지면서 사회적 긴장도 높아졌다. 이에 마크롱 정부가 정치·경제·사회 전반의 위기를 통제할 능력을 잃어가고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10월17일(현지시각) 프랑스 중부 리모주에서 생활비 상승에 항의하는 시위 도중 일부 시위대가 시청 건물에 강제로 진입한 뒤 화재가 발생해 시청이 불타고 있다. ⓒAFP/연합뉴스
AFP와 르몽드의 17~18일 보도에 따르면, 17일 프랑스 전역에서는 고물가와 교육환경 악화, 공공서비스 축소 등에 항의하는 대규모 시위가 벌어졌다. 정부 추산 55만 명, 주최 측 추산 80만 명이 거리로 나왔다. 대부분의 시위는 평화적으로 진행됐지만 일부 지역에서는 약탈과 방화가 잇따랐다. 체포된 사람만 약 2400명에 달했다.
FT에 따르면 상점 약 1500곳이 약탈 피해를 입고 경찰과 소방대원 등 약 1천 명이 다쳤다. 여야 정치권에서는 정부가 폭력 사태의 가능성을 사전에 경고받고도 충분히 대비하지 못했다는 비판이 쏟아지고 있다.
특히 프랑스 중서부 리모주에서는 1883년 완공돼 두 차례 세계대전에서도 견딘 시청 건물이 불길에 휩싸였다. 지붕과 종탑이 무너져 내렸다. 리옹에서는 관광안내소가 불탔고, 마르세유 시청에는 일부 시위대가 난입했다. 보르도에서는 지사 관저가 공격받았다.
정부의 치안 대응을 둘러싼 논란도 확산하고 있다. 정보기관은 당초 시위 참가자를 약 10만 명으로 예상했지만 실제 거리로 나온 인파는 그 몇 배에 달했다. 시위가 수주 전부터 예고됐는데도 경찰 배치와 현장 통제 계획이 부실했다는 지적이 이어졌다.
정치권에서는 책임 공방이 시작됐다. 마크롱 정부는 극좌 성향의 폭력 집단이 혼란을 부추겼다고 주장했지만, 야권은 좌우를 막론하고 내무부의 준비 부족과 대응 실패를 문제 삼았다.
10월18일(현지시각) 프랑스 마르세유 인근에서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이 TV 대국민 연설을 하는 모습이 TV 화면에 나오고 있다. 이번 연설은 생활비 상승과 유가 급등에 항의하는 전국적인 시위에서 충돌이 발생한 지 하루 만에 이뤄졌다. ⓒ로이터/연합뉴스
마크롱 대통령은 18일 오후 8시(현지시각) 엘리제궁에서 약 10분간 대국민 TV 담화를 발표했다. 그는 "오늘 밤 우리 모두는 분노와 수치심을 느끼고 있다"며 폭력 사태를 강하게 규탄했다.
특히 그는 리모주 시청 방화를 거론하며 "프랑스인들이 어떻게 프랑스에 이런 일을 할 수 있는가"라고 반문했다. 극좌파 급진 세력과 범죄자들이 폭력에 가담했다고 주장하며 "그 무엇도 이를 정당화할 수 없고, 설명할 수 없으며, 용서받게 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폭력 가담자에게 단호하게 대응하는 한편, 필요할 경우 일부 집회를 금지하겠다는 방침도 밝혔다.
그러나 담화가 끝나자 이번에는 정치권에서 비판이 쏟아졌다. 극우 정당인 국민연합(RN)의 조르당 바르델라 대표는 엑스(X)에 "한심하다"며 "비겁하고 방향을 잃은 정권은 프랑스 국민에게 더 이상 제시할 것도, 국민을 보호할 힘도 없다"고 비판했다. 보수 공화당(LR)의 브뤼노 르타이요 대표는 대통령 담화를 두고 "매우 우려스럽다"고 평가하며 국가비상사태 선포를 촉구했다.
좌파도 비판에 가세했다. 급진좌파 굴복하지않는프랑스(LFI)의 마뉘엘 봉파르 조정관은 대통령이 담화까지 발표하고도 실질적인 대책을 내놓지 않았다며 무책임하다고 비판했다. 녹색당의 마린 통들리에 대표는 정부의 시위 대응을 "완전한 재앙"이라고 평가하며 내무장관 사퇴를 요구했다.
온라인에서는 조롱까지 등장했다. 대통령이 무슨 말을 할지 미리 맞혀보는 이른바 '담화 빙고'다. 미국 온라인 커뮤니티 레딧에서는 담화 전부터 "이번에도 자신에게는 아무 책임이 없다고 설명하겠지"라는 식의 냉소가 나왔다. 연설 후에도 "국민의 요구는 듣겠지만 답할 생각은 없다는 얘기"라는 취지의 풍자가 이어졌다.
10월6일(현지시각) 프랑스 파리에서 극우 정당 국민연합(RN) 소속 하원의원이자 2027년 프랑스 대통령 선거 후보인 마린 르펜이 당의 2027년도 대안 예산안과 재정 전략을 발표하는 기자회견에 참석하고 있다. 슬로건에는 '프랑스를 위한 재탄생'이라고 적혀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정치권의 시선은 벌써 6개월 앞으로 다가온 대통령 선거로 향하고 있다. 마크롱 대통령이 3연임에 도전할 수 없는 가운데, 차기 대선 여론조사에서는 극우 진영의 대표 주자인 마린 르펜이 선두를 달리고 있다. 잇따른 사회 혼란과 정부의 치안 대응 실패는 강력한 질서 회복을 내세우는 국민연합에 유리하게 작용할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FT가 보도에 인용한 프랑스 정치학자 브뤼노 코트레스도 이번 사태로 가장 즉각적인 정치적 반사이익을 얻는 세력으로 국민연합을 지목했다.
극우 진영은 폭동을 이민 정책 논쟁으로 연결하고 있다. 르펜은 이번 사태가 수십 년간 지속된 통제되지 않은 이민 정책의 결과라고 주장했다. 치안과 이민 문제를 결합해 정부의 책임을 부각하려는 것이다. 이민 정책은 이미 차기 대선의 핵심 쟁점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다만 경찰은 폭력 가담자들과 이민 배경 사이의 직접적인 연관성을 공식적으로 확인하지 않았다.
10월18일(현지시각) 프랑스 파리에서 높은 생활비에 항의하는 전국적인 시위가 이틀째 이어지는 가운데, 진압 경찰과 시위대 간 충돌 속에 도로에 설치된 바리케이드가 불타고 있다. ⓒEPA/연합뉴스
2018~2019년 노란 조끼 시위로 거센 반정부 저항을 겪었던 마크롱은 임기 말 다시 대규모 거리 시위와 폭력 사태에 직면했다. 정부는 예산 갈등을 풀고 금융시장을 안정시키는 동시에 학생들과 시민들의 불만에도 답해야 하는 처지다. 그러나 낮은 지지율과 의회 내 취약한 정치 기반은 위기 수습의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다.
2027년 5월 임기 종료를 앞둔 지금, 거리에서는 변화를 요구하는 함성이 터져 나오고 있다. 마크롱 대통령은 불타는 공공건물들을 바라보며 '분노'를 말하고 있다. 프랑스를 바꾸겠다던 대통령이 이제는 프랑스 시민의 분노를 잠재워야 하는 처지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