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AI) 가상인간이 지난 9월11일 중국 상하이 와이탄 황푸강변의 대형 스크린 무대에 공연자로 섰다. 수천 명의 관객이 모인 가운데 무대에 오른 주인공은 80만 명의 팔로워를 보유한 중국 AI 가상 아이돌 '유리(Yuri)'다.
영상 속 유리는 실제 어린이 합창단과 함께 같은 무대에서 공연하며 현실 세계에 발 디뎌본 적 없는 AI가 성장하면서 겪는 혼란과 성찰을 담은 노래를 불렀다.
9월11일 중국 상해 와이탄 황푸강변에서 열린 '초현실주의' AI 콘서트에서 중국 최초로 공식 가상 인간 신원인증을 받은 AI 가상 아이돌 유리(Yuri)가 오프라인 무대에 데뷔했다. ⓒ유튜브 영상 캡처
이렇게 실제 세계와 가상 세계에서 강한 존재감을 보여주고 있는 '유리'는 중국 당국으로부터 '신분증'을 받고 활동 중이다. 가상인간의 상업 활동을 관리하기 위해 중국이 시범적으로 도입한 관리 제도의 첫 대상이다.
유리가 중국 최초로 가상 아이돌 신원 인증을 받은 건 지난 1월31일이다. 인증 주체는 베이징 경제기술개발구로, 신원 인증을 통해 유리는 디지털 세계에서 존재를 '공식 확인' 받았다. 중국 당국은 이어 6월11일, 상업 공연을 할 수 있도록 '샌드박스 진입 증명서'와 '디지털 아티스트 카드'를 유리에게 발급했다.
디지털 아티스트 카드는 베이징 경제기술개발구의 시범사업에서 가상인간의 상업 공연을 관리하기 위해 발급하는 증표다. 9월에는 '유리'의 개발·운영사인 중국 AI 콘텐츠 브랜드 ‘AI.TALK’가 디지털 위안화로 대금을 받을 수 있도록 결제 창구를 마련했다. 디지털 위안화는 중국 중앙은행이 발행하는 법정화폐를 디지털 형태로 구현한 것이다.
이 제도는 베이징 경제기술개발구가 추진하는 '신질 생산력 샌드박스 승인' 시범 사업의 일환이다. '샌드박스'는 새로운 기술이나 사업 모델을 제한된 범위에서 시험 운영하면서 안전성과 규정 준수 여부를 점검하는 제도다.
유리는 사전 심사와 운영 중에 감독을 받으며 정해진 범위 안에서 상업 공연을 할 수 있다. 이는 가상인간의 활동을 제도권 안으로 편입하려는 움직임인 동시에 그 활동을 관리·감독하는 체계를 마련하려는 시도로 평가된다.
중국에서는 가상인간의 상업 활동이 다양해지면서 이를 관리할 제도적 장치의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다. 중국전매대학의 '2025 중국 디지털 휴먼 영향력 지수 보고서'에 따르면 2024년 말 기준 중국의 가상 인간 관련 기업은 약 135만 곳에 달했다. 가수와 배우, 쇼호스트, 인플루언서 등 가상인간의 활동 영역이 넓어지면서 이들이 제작하거나 홍보하는 콘텐츠의 신뢰성을 확보하는 방안도 주요 과제로 떠오른다.
데뷔하고 약 한 달 만에 40만 명이 넘는 팔로워를 둔 중국 AI 배우 '팡타오쯔'는 7월 콘택트 렌즈 광고에서 "하루 종일 착용해도 편안하다"고 표현했다. 이를 두고 일각에서는 신체 경험이 없는 AI가 제품을 실제로 사용한 것처럼 표현해도 되는가에 관해 논란이 일었다. 8월15일 JTBC 뉴스에 따르면 현지 법률 전문가는 "AI 모델은 실존 인물이 아니기에 제품을 사용할 수 없으므로 모델이 직접 체험 후기를 말하는 방식의 광고는 부적절하다"고 말했다.
가상인간의 신원 인증은 이처럼 소비자 보호를 위한 장치가 될 수 있다. 운영 주체를 확인할 수 있다면 허위 광고나 사기 등 문제가 발생했을 때 책임을 물을 대상을 추적하기 쉬워지기 때문이다. 지니 패터슨 멜버른대 AI·디지털 윤리 센터 교수는 7일 호주 공영방송 ABC와 인터뷰에서 "디지털 신원 확인이 가상인간을 제공한 기업까지 책임을 추적하는 수단이 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반면 신원 등록이 국가의 감시를 강화하는 수단으로 활용될 수 있다는 우려도 있다. 같은 인터뷰에서 레넌 창 디킨대 사이버 보안 전문가는 "신원 등록으로 익명성이 약화되면 기업이 규제에 대한 부담으로 콘텐츠를 스스로 제한하는 자기 검열이 강화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이러한 우려는 중국의 기존 연예인 규제 환경과 함께 살펴볼 수 있다.
중국 국가인터넷정보판공실은 2021년 11월23일 연예인 관련 온라인 정보 관리 지침을 공개했다. 지침 제 10항은 각 플랫폼이 일정한 팬 수와 영향력을 갖는 연예인 계정을 실시간 모니터링하여 동향을 감시하도록 했다. 또 민감한 사회적 이슈와 관련해 여론을 왜곡하거나 극단적 감정을 부추기는 콘텐츠를 게시한 계정에는 조치를 취한 뒤 관련 당국에 보고하도록 했다.
같은 해 배우 장저한은 일본 야스쿠니신사 방문 사진이 알려진 뒤 중국 소셜미디어 계정이 폐쇄됐다. 중국에서 연예인의 활동이 정치적 기준과도 맞물릴 수 있음을 보여준다.
중국은 AI기술의 산업적 활용을 확대하는 동시에 관련 서비스의 운영 방식과 콘텐츠 관리 체계도 구축하고 있다.
중국에서 AI 가상인간과 디지털 기술은 공공서비스와 정치·역사 교육 영역으로도 확대되고 있다. 베이징 펑타이구는 2025년 3월 행정서비스센터에 AI 가상 직원을 도입해 주민과 기업의 문의에 답하고 정책과 행정 절차를 안내하도록 했다. 호주 ABC는 베이징에서 가상인간을 활용해 공산당원에게 정치적 지침을 전달하고 이념·역사 교육을 진행하고 있다고 10월7일 보도했다.
한국에서도 디지털 신원 인증 기술을 AI와 로봇으로 확장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 중국이 가상인간의 상업 활동과 콘텐츠 관리를 위해 신원 인증 제도를 도입했다면, 국내에서는 AI와 로봇의 행동 권한을 관리하고 보안성을 높이는 데 기술을 활용하려는 시도가 이뤄지고 있다.
국내 보안·인증 기업 라온시큐어는 15일 정부 지원 연구개발 과제의 주관기관으로 선정돼 피지컬 AI에 분산신원인증(DID) 기술을 적용하는 방안을 개발한다고 밝혔다. DID는 디지털 환경에서 개체의 신원을 확인하고 관련 정보를 관리하는 기술이다. 라온시큐어는 이를 통해 로봇과 AI의 신원·권한·활동 이력을 관리하고 허용 범위를 벗어난 명령을 차단하는 것을 목표로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