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온라인에서는 걸그룹 에이투오 라이트(A2O LITE)의 노래 가사가 '미혼 앤 비혼(Neon and Beyond)'처럼 들린다는 데서 시작된 밈이 인기다.
결혼하지 않을 자유가 유쾌한 유행어로 소비되는 시대지만, 세계 곳곳에는 결혼을 선택할 자유조차 사라진 소녀들이 있다. 기후재난으로 빈곤에 내몰려 어린 나이에 결혼해야 하는 소녀들이다.
가뭄 속에 선 임산부와 홍수에 휩싸인 어린아이의 모습. ⓒAI 생성 이미지
영국 일간지 가디언은 지난 15일(현지시각) 아프가니스탄 바드기스주에서 극심한 가뭄과 빈곤으로 생계가 무너진 가족들이 빚을 갚거나 식량을 구하기 위해 어린 딸들을 결혼시키고 있다고 보도했다. 일부 가정에서는 8~10세 소녀들의 결혼까지 약속한 것으로 전해졌다.
세계적으로 18세 이전에 결혼하는 ‘조혼’은 줄어드는 추세지만, 기후재난이 이러한 흐름을 위협하고 있다. 가뭄과 홍수, 사이클론으로 생계 기반과 교육 기회를 잃은 소녀들이 어린 나이에 결혼하도록 내몰리고 있는 것이다.
네팔에서도 비슷한 우려가 나온다. 지난 8월 대규모 홍수가 발생하면서 그동안 조혼을 줄여온 성과가 흔들릴 수 있다는 것이다.
지난 8월26일 네팔 북중부 지역을 강타한 홍수는 마을과 도로, 학교 등 기반시설을 파괴했다. 유엔아동기금(유니세프)은 이튿날 발표한 긴급 대응 자료에서 최소 1만 7천 명의 아동이 홍수 피해를 입었으며, 피해 지역 아동들이 폭력과 착취 등 위험에 노출돼 있다고 경고했다.
8월30일(현지시각) 네팔 누와코트 지역 데비가트에서 발생한 치명적인 돌발 홍수와 산사태로 리쿠강 인근 건물들이 진흙에 뒤덮이고 파손된 모습이 드론으로 촬영됐다. ⓒ로이터/연합뉴스
네팔은 지난 10여 년간 조혼을 줄이는 데 상당한 성과를 거둔 나라다. 유니세프가 지난 8일 발표한 '네팔 아동결혼 근절: 10년간의 데이터와 행동 촉구' 보고서에 따르면 20~24세 여성 가운데 18세 이전에 결혼한 비율은 2014년 37%에서 2024~2025년 28%로 떨어졌다. 10년 새 9%포인트 감소한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여성 4명 중 1명 이상이 성인이 되기 전에 결혼한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빈곤한 가정의 소녀들이 조혼에 더 취약했다. 가장 빈곤한 가정의 소녀들은 가장 부유한 가정의 소녀들보다 18세 이전에 결혼할 가능성이 4.4배 높았다.
여기에 대규모 홍수까지 덮치면서 생계와 교육 기반을 잃은 가정의 소녀들이 조혼에 내몰릴 위험도 커질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기후재난 이후 조혼이 실제로 증가한 사례는 방글라데시에서 확인됐다. 지난 5월26일 국제학술지 '개발연구저널(The Journal of Development Studies)'에 발표된 논문 '자연재해와 아동결혼: 2007년 방글라데시 사이클론의 증거'는 2007년 방글라데시를 강타한 사이클론 '시드르'가 아동결혼에 미친 영향을 분석했다.
연구 결과, 사이클론 피해 지역에서 14~18세 소녀들의 조혼이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연령이 낮은 소녀들에게 미친 영향이 컸으며, 빈곤 수준이 높거나 재난 피해가 심각한 지역일수록 증가세가 두드러졌다.
주목할 점은 조혼이 증가한 시기다. 재난 직후가 아니라 약 6개월이 지난 뒤부터 조혼이 늘어나는 경향이 확인됐다. 재난으로 농경지와 생계 수단을 잃은 가정에 경제적 압박이 누적되면서 소녀들이 어린 나이에 결혼하도록 내몰릴 수 있다는 것이다.
아프리카에서도 비슷한 위험이 보고되고 있다. 유니세프가 지난 1월 발표한 ‘케냐의 기후변화가 아동결혼, 청소년 임신 및 여성 생식기 절제에 미치는 영향’ 연구는 아동과 보호자, 지역사회 관계자 등 500명 이상을 대상으로 기후위기가 아동 보호에 미치는 영향을 조사했다.
10월14일(현지시각) 인도네시아 서자바주 브카시 지역 치바루사 마을에서 한 주민이 지역 공동체가 배급한 물을 플라스틱 통에 담아 운반하고 있다. 엘니뇨의 영향으로 장기간 가뭄이 이어지면서 주민들은 일상생활에 필요한 물을 확보하기 위해 정부와 지역 공동체의 급수 지원에 의존하고 있다. 인도네시아 기상기후지구물리청(BMKG)에 따르면 엘니뇨로 인한 기후 현상으로 전국적으로 가뭄이 장기화하고 산불 위험도 커지고 있다. ⓒEPA/연합뉴스
연구 결과, 가뭄과 홍수 등 기후 충격은 빈곤과 식량 불안정, 이주, 학업 중단을 심화시키고 가족과 지역사회의 보호체계를 약화시키는 것으로 나타났다. 생계가 어려워지면서 일부 소녀들은 경제적 지원을 얻기 위해 혼인신고 없이 사실상 부부처럼 생활하거나 생존을 위해 성적 거래에 내몰리는 등 위험한 상황에 놓였다. 이는 청소년 임신 등의 위험으로도 이어질 수 있었다.
조혼은 여전히 전 세계적인 문제다. 유니세프와 유엔인구기금(UNFPA)이 지난 5월 22일 발표한 ‘아동결혼 근절 글로벌 프로그램 2025년 연례 성과보고서’에 따르면, 전 세계에서 해마다 약 1200만 명의 여아가 18세 이전에 결혼한다. 약 3초마다 한 명꼴이다. 현재 생존한 여성과 여아 가운데 약 6억 5천만 명이 미성년자 시절 결혼한 경험이 있는 것으로 추산된다.
조혼을 막기 위한 핵심 수단 중 하나는 교육이다. 세이브더칠드런과 영국 런던정경대(LSE)가 2025년 발표한 ‘남아시아 아동결혼 감소 연구’에서도 인도와 방글라데시, 파키스탄, 네팔의 조혼 감소에 여아 교육 확대와 조건부 현금 지원이 중요한 역할을 한 것으로 분석됐다. 연구진은 여아 교육 확대뿐 아니라 가계 지원과 아동 보호체계 강화, 조혼을 부추기는 사회적 관행의 변화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기후위기는 결혼뿐 아니라 출산에 관한 선택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기후과학자들도 예외는 아니다.
영국 일간지 가디언이 2024년 5월10일 보도한 기후과학자 설문조사에 따르면,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 간 협의체(IPCC) 보고서에 참여한 여성 과학자 응답자 97명 가운데 17명(17.5%)은 기후·환경 위기에 대한 우려로 자녀를 낳지 않거나 당초 계획보다 적게 낳기로 했다고 답했다. 남성 응답자 가운데서도 7%가 같은 선택을 했다고 밝혔다. 이들은 자녀가 살아갈 미래의 환경을 걱정하거나 인구 증가가 환경에 미치는 영향을 고려해 출산을 고민했다.
기후재난은 집과 농경지, 생계 수단뿐 아니라 삶의 선택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일부 소녀들은 생계 위기로 교육 기회를 잃고 어린 나이에 결혼하도록 내몰리는 반면, 기후과학자들은 미래 세대가 살아갈 환경을 우려해 출산을 고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