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기선 HD현대그룹 회장이 회장 취임 1년을 보름여 앞두고 HD현대중공업의 총파업 리스크를 덜 수 있게 됐다. 향후 HD현대중공업을 중심으로 한 조선 부문의 사업 확장에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된 셈이다.
정 회장은 그룹의 핵심 축인 조선 부문에서 인공지능(AI) 데이터센터 발전용 엔진 신사업과 미국 시장 본격 진출에 속도를 높일 것으로 예상된다.
최근 HD현대중공업의 대규모 엔진 생산설비 증설 결정이 정 회장 취임 뒤 처음으로 나온 ‘조 단위’ 신사업 투자라는 점, 한미 조선협력(MASGA·마스가)의 폭을 넓히기 위해서는 현지 조선소 투자가 필수라는 점 등을 고려하면 이 두 분야에서의 성과는 총수로서 정 회장의 초반 경영성과를 가를 요소로 꼽힌다.
정기선 HD현대그룹 회장이 HD현대중공업의 '총파업 리스크'를 털고 엔진 신사업 확장과 미국 시장 공략에 속도를 낼 수 있을지 주목된다. ⓒHD현대
HD현대중공업 노사는 30일 22차 교섭을 마치며 올해 임금 및 단체협약(임단협) 잠정합의안을 도출했다.
노사는 전날 오후 2시부터 교섭을 시작해 이날 오전 4시까지 12시간이 넘는 협상 끝에 접점을 찾았다. 6월2일 올해 임단협 상견례를 가진 지 120일 만에 처음으로 잠정합의안을 이끌어 낸 것이다.
잠정합의안에는 기본급 12만 원(호봉승급분 5만 원 포함) 인상을 골자로 격려금 등 일시금 1100만 원과 약정임금의 200% 및 올해 성과급, 출산 휴가 및 장기근속자 포상 확대, 올해 생산기술직 신규 채용 등의 내용이 담겼다.
노조는 영업이익의 최소 30% 성과 공유를 요구해 왔지만 사측의 일시금 지급 방향으로 의견이 모아진 것으로 파악된다. 기본급 인상분과 일시금, 성과급 등을 더하면 올해 임단협을 통해 조합원들은 1인당 평균 4056만 원을 받는 효과가 있는 것으로 추산된다.
HD현대중공업 관계자는 “이번 잠정합의안은 노사가 오랜 고민과 협의를 거쳐 마련한 결과”라며 “구성원들의 충분한 이해와 공감을 바탕으로 임단협이 최종 타결로 이어져 노사가 함께 회사의 경쟁력을 높이고 지역경제에도 활력을 더하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지난해 10월17일 승진한 정기선 회장은 올해 조선 부문에서 역대급 실적 속에서도 HD현대중공업의 파업 리스크를 안고 있었다. 노사가 추석 명절 이전 합의에 실패한 가운데 노조는 연휴 이후 총파업을 진행하겠다는 방침까지 세워뒀다.
노조는 10월2일 잠정합의안을 놓고 전체 조합원 찬반투표를 진행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찬반투표 결과에 따라 타결에 이르지 못하고 다시 협상을 진행해야 할 수 있지만 정 회장으로서는 생산 차질까지 이어질 수 있는 당장의 총파업 리스크를 덜 수 있게 됐다. 또 정 회장이 조선 부문에서 여러 분야로 사업을 확장하는 일에 더욱 집중할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된 것이다.
정 회장은 상선 부문 호조를 등에 업고 사업 측면에서는 엔진 신사업으로, 지역 측면에서는 미국 시장으로 발을 넓히고 있다.
다만 이 두 분야가 아직 본궤도에 올랐다고 보기 힘든 만큼 임단협 타결 이후 엔진 사업 신규수주와 미국 조선소 인수에 더욱 속도를 낼 것으로 예상된다.
HD현대중공업은 AI 데이터센터 발전용 엔진 사업 강화에 강한 의지를 나타내고 있다.
HD현대중공업은 10일 1조772억 원을 투자해 발전엔진 신규 생산기지와 소형모듈원전(SMR) 제작 전용 공장 건립에 나서기로 결정했다.
이 가운데 80%가 넘는 8336억 원이 울산 발전엔진 투자에 쓰이는데 HD현대중공업은 AI 데이터센터 전력 수요에 선제적으로 대응해 육상 발전 시장 공략에 박차를 가하기 위함이라고 설명했다.
정 회장이 HD현대중공업에서 임원으로 직접 경영에 참여하고 있지 않지만 이번 엔진 생산설비 증설 결정이 정 회장에게 미치는 의미는 적지 않은 것으로 평가된다.
정 회장이 그룹 조선 부문 컨트롤타워 역할을 하는 중간 지주사 HD한국조선해양의 전략부문 대표이사를 겸하고 있을 뿐 아니라 HD현대중공업의 이번 증설은 오너경영체제가 공식화한 뒤 그룹 전체에서도 처음으로 진행되는 대규모 신사업 투자다.
HD현대중공업은 올해 들어 1조5831억 원에 이르는 미국 데이터센터 발전용 엔진 수주를 따냈다. 다만 향후 증설이 예정돼 있고 여전히 시장 진입 초기 단계인 만큼 지속적으로 수주성과를 올려 사업의 지속가능성을 입증해야 하는 상황으로 분석된다.
미국 현지 조선소 투자도 정 회장이 조선 부문에서 매듭지어야 할 숙제로 꼽힌다. 조선업계에 따르면 HD현대그룹은 미국 현지 조선소 2~3곳과 인수 협상을 진행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트럼프 행정부가 해외 기업의 미국 군함 건조를 허용하기로 결정한 가운데 이 분야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미국에 위치한 기존 조선소의 소유권 또는 과반수 지분을 인수한 기업’이라는 조건을 만족해야 한다.
조선업계 경쟁사인 한화오션을 포함한 한화그룹이 한미 조선협력에서 한발 앞서간다는 평가를 받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한화그룹은 필리조선소를 인수해 현지 생산거점을 확보했다.
HD현대그룹은 5월 HD한국조선해양 아래 미국의 100% 자회사인 투자법인 HD현대USA를 설립하면서 미국 진출을 사실상 공식화하기도 했다.
향후 HD현대그룹 차원의 미국 조선소 인수에서 군함을 직접 생산하는 HD현대중공업이 지분투자 등을 통해 관여할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HD현대중공업은 지난해 12월 함정 건조에 적합한 도크와 설비, 인력을 지닌 HD현대미포를 흡수 합병한 뒤 방산 역량이 더욱 강화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HD현대중공업은 앞서 18일 공시를 통해 “HD현대그룹은 한미 조선협력 마스가 프로젝트의 성공적 추진을 위해 미국 현지 조선소 인수 및 지분투자를 포함한 다양한 방안을 검토하고 있지만 현재까지 확정된 사항은 없다”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