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접 구운 빵이 식탁에 오르고, 예쁜 드레스를 입은 아내는 아이들을 돌보며 남편과 가족을 중심으로 하루를 살아간다.
이른바 '트래드와이프(tradwife·전통적인 아내)'의 삶을 내세우며 수백만 팔로워를 모은 인플루언서가 어느 날 자신이 그토록 동경하고 낭만화해 온 과거에 떨어진다면 어떻게 될까. 스마트폰도, 팔로워도, 마음에 들지 않는 장면을 잘라낼 편집 기술도 없는 1855년으로 말이다.
카로 클레어 버크의 소설 '예스터이어' 스페인어판 책 표지(왼쪽), 배우 앤 해서웨이 ⓒ아마존 사이트/연합뉴스
배우 앤 해서웨이가 바로 이 영화의 주연으로 참여한다. 작가 카로 클레어 버크는 지난 8월9일 미국 시사주간지 '더 뉴요커'와 나눈 인터뷰에서 자신의 소설 '예스터이어(Yesteryear)'가 앤 해서웨이 주연의 영화로 제작될 예정이라고 밝혔다. 아마존 MGM 스튜디오가 영화 판권을 확보했고, 해서웨이는 주연뿐 아니라 제작자로 참여한다. 아직 개봉일은 공개되지 않았다.
지난 4월 출간돼 논쟁을 불러일으킨 '예스터이어'는 현대 여성을 1855년 미국으로 던져 넣은 풍자적 심리 스릴러다. 주인공 나탈리 헬러 밀스는 미국 아이다호의 농장에서 남편과 다섯 아이를 돌보며 '옛날 방식의 삶'을 보여주는 유명 트래드와이프 인플루언서다. 직접 음식을 만들고 집안일을 하는 일상을 콘텐츠로 만들어 부와 인기를 얻었지만, 화면 밖에서는 철저하게 현대적인 콘텐츠 비즈니스가 돌아간다.
그러던 어느 날 나탈리는 자신이 그토록 낭만화하던 과거, 1855년에서 눈을 뜬다. 이번에는 카메라 밖의 현실이 정면으로 닥쳐온다.
트래드와이프는 'traditional wife(전통적인 아내)'의 줄임말이다. 한국의 '현모양처'를 떠올릴 수 있지만 정확히 같은 개념은 아니다. 가사와 육아를 맡고 남편과 가족을 중심에 두는 전통적인 성 역할을 하나의 라이프스타일로 보여주는 온라인 문화라는 점이 중요하다.
지난해 8월 케임브리지 사전에 새롭게 추가된 '트래드와이프'의 정의에서도 SNS는 빠지지 않는다. 사전에서는 트래드와이프를 소셜미디어에 자신의 생활을 공유하면서 집에서 요리와 청소를 하고 아이를 돌보는 기혼 여성으로 설명한다.
바로 여기서 역설이 생긴다. 직장 대신 가정을 택한 여성의 삶을 보여주는 것 자체가 그 여성의 직업이 된다는 것이다. 반죽을 치대고 아이에게 밥을 먹이는 일상이 콘텐츠가 되고, 집은 촬영장, 가사는 수익을 만드는 노동이 된다.
카로 클레어 버크의 소설 '예스터이어' 영어판 책 표지 ⓒPenguin Random House 출판사 홈페이지
그렇다면 작가는 왜 나탈리를 하필 1855년으로 보냈을까. 미국 남북전쟁이 시작되기 불과 6년 전으로, 노예제를 둘러싼 갈등이 격화되던 시기였다. 여성의 법적·사회적 권리 역시 오늘날과 크게 달랐다. 특히 기혼 여성은 지역에 따라 재산과 임금에 대한 권리나 독자적으로 계약을 맺을 권리 등이 크게 제한돼 있었다.
이 도발적인 설정은 출간 직후부터 논쟁을 불러왔다. '워싱턴포스트'는 6월18일 이 작품을 그해 여름의 '반드시 토론하게 되는(must-discuss)' 책으로 소개하며 독자들의 반응이 크게 엇갈리고 있다고 전했다.
트래드와이프 세계관을 비판하기 위해 주인공을 지나친 풍자의 대상으로 삼은 것은 아닌지, 정작 오늘날 일부 여성들이 왜 이런 삶에 매력을 느끼는지는 충분히 들여다보지 못한 것 아니냐는 지적도 나왔다.
버크는 '더 뉴요커' 인터뷰에서 자신의 관심이 트래드와이프 개인을 조롱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미국 사회가 만들어내는 판타지와 잘못된 정보, 사람들이 역사와 현재를 자신에게 편리한 방식으로 재구성하는 문제를 소설에 담으려 했다는 것이다.
'트래드와이프'라는 꼬리표 거부하는 여성들
트래드와이프 이미지. AI 합성 이미지
트래드와이프를 둘러싼 현실도 변하고 있다. 최근에는 이 생활방식을 경험한 여성들이 트래드와이프라는 이름과 어떻게 거리를 두는지를 분석한 연구까지 등장했다.
베로니카 호프너와 소피아 사익스는 지난 4월 여성심리학 분야 학술지 'Psychology of Women Quarterly'에 발표한 논문에서 이를 '디트래딩(De-Tradding)'이라는 개념으로 분석했다. 연구진은 전통적 가정생활은 유지하면서도 정치적·상업적 의미가 붙은 트래드와이프라는 꼬리표를 거부하는 경우와, 불평등한 권력관계나 가정폭력, 외도 등을 경험한 뒤 트래드와이프 생활방식 자체에서 이탈하는 경우 등을 구분해 살폈다.
한국에서도 살림과 육아, 집밥 등 전업주부의 일상을 보여주는 콘텐츠는 낯설지 않다. 다만 이를 곧바로 트래드와이프라고 부르기는 어렵다. 영미권에서 확산한 트래드와이프는 가사와 육아에 전념하는 데 그치지 않고 전통적 성 역할을 이상적인 라이프스타일로 제시하며 이를 SNS 콘텐츠로 보여주는 온라인 문화의 성격이 강하기 때문이다.
물론 누군가는 직장생활 대신 가사와 육아를 중심으로 살아가길 원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이를 선택할 수 있다는 점이다. 오늘날 여성이 '전통적 아내의 삶'을 스스로 택할 수 있는 것 역시 다양한 삶의 방식 가운데 하나를 고를 권리와 선택지가 전제돼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과거를 보여주는 방식이다. SNS 속 트래드와이프 콘텐츠에서 과거는 종종 아름답게 편집된다. 반면 그 시대 여성들이 감당해야 했던 고된 가사노동과 출산, 경제적 의존, 제한된 교육·직업 기회와 권리는 카메라 밖으로 밀려나기 쉽다.
그래서 앤 해서웨이가 연기할 나탈리의 시간여행은 과거 체험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그가 콘텐츠로 만들어 온 과거의 이미지와 실제 그 시대 여성들이 처했던 현실이 정면으로 맞부딪치기 때문이다.
트래드와이프 인플루언서들은 과거 여성들의 삶에서 어느 부분을 보여줄까. 이번에도 고된 노동과 불평등한 현실은 잘라내고, 예쁜 드레스와 갓 구운 빵만 남긴 '편집된 과거'를 보여줄까. '예스터이어'는 과거라는 거울에 현재를 비추는 시도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