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공정거래위원회의 조사와 제재가 잇따르는 가운데 기업들이 처분을 그대로 받아들이기보다 법원 판단을 구하는 사례가 이어지고 있다.
기업들은 과징금뿐 아니라 현장조사와 자료제출명령, 가격 재결정 명령까지 법원에 가져가며 공정위 처분의 범위와 절차가 적정한지 다투고 있다.
주병기 공정거래위원장이 11일 서울 중구 대한상공회의소 내 공정거래조정원에서 열린 가맹 업주 협상력 강화 관련 간담회에 참석해 발언하고 있다. ⓒ연합뉴스
21일 공정위와 법조계에 따르면 최근 공정위 관련 집행정지 사건은 과징금 등 최종 제재뿐 아니라 조사와 시정명령 단계로 범위가 넓어지고 있다. 쿠팡은 현장조사 결정에, 한화는 자료제출명령에 각각 집행정지를 신청했다. 제지·제분업체들은 가격 재결정 명령에, 설탕업체들은 과징금 납부명령에 불복했다. 법원은 이들 사건에서 기업 측 집행정지 신청을 잇따라 받아들였다.
다만 집행정지 결정이 공정위 처분의 위법성을 인정한 것은 아니다. 집행정지는 본안 판결 전까지 처분의 효력을 일시적으로 멈추는 절차다. 법원은 처분을 그대로 집행할 경우 회복하기 어려운 손해가 발생할 우려가 있는지 등을 따진다. 공정위 조사의 적법성이나 담합 판단, 과징금 산정의 타당성은 본안에서 별도로 판단한다.
조사 단계에서는 공정위의 현장조사 절차와 자료 요구 범위가 법원 판단을 받고 있다. 쿠팡은 대규모유통업법 관련 현장조사에서 사전통지를 받지 못했다며 조사 결정의 취소소송과 집행정지를 신청했고, 법원은 현장조사 결정의 효력을 잠정 정지했다. 공정위는 대규모유통업법에 따라 사전통지 예외에 해당한다는 입장이다.
한화 사건에서는 공정위가 조사 과정에서 요구할 수 있는 자료의 범위가 쟁점이 됐다. 공정위는 계열사 간 상표권 사용료 관련 조사를 진행하면서 자료제출명령을 내렸고, 한화 측은 이에 집행정지를 신청했다. 서울고법은 자료제출명령의 효력을 정지했다. 공정위의 자료 요구 단계부터 법원의 판단을 받은 것이다.
제재 이후에는 공정위가 기업의 가격 결정에 어디까지 관여할 수 있는지가 다퉈지고 있다. 공정위는 지난 4월 6개 제지사에 총 3383억 원의 과징금을 부과하면서 가격을 다시 결정하고 3년간 변경 내용을 보고하도록 명령했다. 서울고법은 무림SP·무림페이퍼·무림P&P·한국제지의 가격 재결정 명령 집행정지 신청을 받아들였다.
과징금 사건에서는 제재 금액뿐 아니라 산정 기준과 관련 매출의 범위도 법적 쟁점이 되고 있다. 공정위는 지난 5월 7개 제분사에 총 6710억4500만 원의 과징금과 가격 재결정 명령을 내렸고, 일부 업체가 집행정지 결정을 받았다. 설탕 담합 사건에서도 삼양사와 대한제당이 과징금 납부명령에 대한 집행정지 결정을 받았다.
사업자단체 제재에서는 공정위의 금지 범위가 어디까지인지가 쟁점이 됐다. 서울고법은 대한산란계협회의 가격정보 제공 금지명령에 대해 공정위와 사전 협의를 거치는 경우 일부 정보를 제공할 수 있도록 조건부로 효력을 정지했다. 공정위는 가격경쟁 제한을, 협회는 시장정보 제공을 주장했고 법원은 가격정보 제공을 전면 금지하지 않고 사전 협의라는 조건을 붙였다.
기업들의 법적 대응이 이어지는 가운데 공정위는 규제와 제재를 완화하기보다 조사와 제재의 실효성을 높이겠다는 입장이다. 주병기 공정위원장은 지난 21일 취임 1주년 기자간담회에서 “경영 활동을 위축시키니 공정위 규제를 완화해야 한다는 주장은 헛된 말”이라며 “비정상적 경영 활동, 불공정한 반칙은 당연히 위축돼야 한다”고 말했다.
최근 기업들의 집행정지 신청에 대해서도 “공정위 조사가 실질적으로 무력화된 것에 대해 굉장히 유감”이라며 “반칙을 저지르고 얻는 이익보다 법 위반에 따른 불이익이 크도록 ‘게임의 틀’ 자체를 바꿔야 한다”고 제재 강화 의지를 내비쳤다. 공정위는 현장조사를 우회할 여지를 줄이도록 조사 관련 내부 규칙을 손질하는 방안도 검토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