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을 영화로 만들면 흥행은 몰라도 평단의 호평은 기대하기 어렵다는 공식이 깨지고 있다. 국내 흥행 성적은 아직 평범한 수준에 머물고 있지만, 게임 원작 영화 '레지던트 이블 : 0번째 밤'은 전문가 평점에서 이례적인 기록을 세우며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잭 크레거 감독의 영화 '레지던트 이블 : 0번째 밤' 관련 AI로 생성한 이미지.
잭 크레거 감독의 영화 '레지던트 이블 : 0번째 밤'이 17일 국내 개봉했다. 영화는 의료 택배 기사 브라이언(오스틴 에이브람스)이 긴급 배달을 위해 한밤중 라쿤 시티 종합병원으로 향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린다. 도로 위에서 정체불명의 존재와 마주친 순간부터 평범했던 그의 밤은 목숨을 건 생존의 시간으로 바뀐다.
한국 영화진흥위원회에 따르면 '레지던트 이블 : 0번째 밤'은 개봉 후 하루 동안 2만1922명의 관객을 동원했다. 개봉 전 관객 951명을 포함한 누적 관객 수는 2만2873명으로, 박스오피스 3위를 기록했다. 1위는 동명 영화 '인턴'(2015)을 리메이크한 최민식·한소희 주연의 '인턴'이 차지했으며, 2위에는 호메로스의 서사시 '오디세이아'를 배경으로 한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오디세이'가 올랐다.
흥행 성적만 놓고 보면 아직 시작 단계이다. 하지만 이 영화는 이례적으로 높은 전문가 평점을 얻었다. 미국 영화 평점 사이트 '메타크리틱'에서 80점을 기록하고 있으며, 로튼토마토에서도 토마토지수 96%를 기록하고 있다. 최근 흥행한 상업영화와 비교해도 높은 수준이다. '스파이더맨 : 브랜드 뉴 데이'의 메타크리틱 점수는 66점, '프로젝트 헤일메리'는 77점이다.
게임으로 영화를 만들면 망한다?
영화 '수퍼 소닉3' 포스터(왼쪽), 영화 '툼 레이더' 포스터(가운데), 영화 '명탐정 피카츄' 포스터. 모두 평단의 좋은 평가를 받지는 못했다. ⓒ롯데엔터테인먼트, 워너 브라더스 코리아
그동안 게임을 원작으로 한 영화는 흥행 여부와 별개로 평단의 높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게임 원작 영화의 평단 성적이 얼마나 저조했는지는 역대 메타크리틱 점수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2위인 '8번 출구'(2025)가 71점으로 선전했을 뿐, 3위 '놈이 우리 안에 있다'(2021)는 66점에 그쳤고 이후 '모탈 컴뱃'(1995) 59점, '수퍼 소닉3'(2024) 56점, '아이언 렁'(2026) 54점, '명탐정 피카츄'(2019) 53점, '페르시아의 왕자 : 시간의 모래'(2010) 50점, '레지던트 이블 : 파멸의 날'(2016) 49점, '툼 레이더'(2018) 48점으로 줄줄이 50점 안팎에 머물렀다. '8번 출구'의 71점을 기점으로 점수가 가파르게 떨어지는 모양새다.
물론 게임 원작 영화의 평가를 단순히 점수만으로 설명할 수는 없다. 다만 상당수 작품이 원작의 인지도와 IP 파워를 활용하는 데 집중하면서, 게임만이 가진 재미를 영화 안에서 어떻게 구현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이 부족했다는 지적이 꾸준히 제기돼 왔다.
게임에는 영화와 다른 방식으로 관객을 몰입시키는 장치가 있다. 직접 캐릭터를 움직이고, 제한된 자원을 관리하며, 다음에 무엇이 나타날지 모르는 상황에서 스스로 판단해야 한다. 따라서 유명 IP와 캐릭터만 가져와 일반적 액션 블록버스터의 문법으로 재구성하는 것만으로는 원작 팬들이 기대하는 경험을 전달하기 어렵다.
원작에 대한 애정으로 만든 '레지던트 이블 : 0번째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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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지던트 이블 : 0번째 밤'의 차별점은 바로 이 지점에서 드러난다. 잭 크레거 감독은 원작 게임 '레지던트 이블' 시리즈를 수천 시간 동안 플레이했다고 직접 밝힐 정도로 오랜 팬이다. 특히 가장 좋아하는 작품으로 '레지던트 이블 4'를 꼽으며, 리마스터 버전이 출시된 이후에도 결말을 본 후에도 여러 차례 반복해서 플레이할 정도로 게임 자체에 대한 애정을 드러냈다.
이에 잭 크레거 감독은 이전에 제작된 '레지던트 이블' 실사영화 시리즈를 의도적으로 참고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팟캐스트 인터뷰에서 기존 영화들이 자신이 사랑한 게임의 느낌과 달랐기 때문이라고 설명하면서, 이번 작품에서는 게임이 주는 공포와 긴장감, 제한된 자원을 관리해야 하는 절박함을 스크린으로 옮기는 데 집중했다고 언급했다.
영화는 원작 게임의 주요 캐릭터를 전면에 내세우기보다 새로운 인물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전개한다. 대신 게임의 장르적 특징을 적극적으로 가져왔다. 주인공에게 남은 총알의 수를 관객이 계속 의식하도록 만들고, 게임에서 진행에 필요한 상징적인 회복 아이템인 그린 허브와 구급 스프레이 등을 등장시키는 한편 1인칭 시점 화면도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게임을 이해하는 감독이 대세가 됐다
게임 '데스 스트랜딩' 캐릭터 포스토(왼쪽), 게임 '젤다의 전설 브레스 오브 더 와일드' 관련 이미지. ⓒ코지마 프로덕션, 닌텐도
이처럼 게임의 유명세만 가져와 영화로 만드는 방식이 한계를 드러내면서 최근에는 원작 게임의 구조와 분위기를 제대로 이해하는 감독을 찾으려는 움직임도 강해지고 있다.
게임 '젤다의 전설' 실사영화의 경우 닌텐도가 제작에 깊숙이 관여하면서 게임의 정체성을 훼손하지 않는 연출자를 찾는 과정이 이어졌고, 결국 영화 '메이즈 러너' 시리즈의 웨스 볼 감독이 연출자로 낙점됐다. 게임 '데스 스트랜딩' 역시 원작자인 코지마 히데오가 자신의 비전을 이해할 수 있는 감독을 찾는 데 공을 들였고, 영화 '피그', '콰이어트 플레이스: 첫째 날' 등을 연출한 마이클 사르노스키 감독이 선택됐다.
게임 원작 영화에서 중요한 것은 결국 IP의 이름만이 아니다. 게임 팬덤은 원작의 세계관과 특정 설정(LORE)은 물론 캐릭터의 성격, 작품의 톤, 게임플레이의 메커니즘 같은 세부 요소에도 민감하게 반응한다. 때문에 원작을 단순히 '유명한 소재'로 바라보는 것과 '왜 이 게임이 재미있는가'를 이해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라는 지적이 나온다.
뱌르케 리보리우센 중국 닝보 노팅엄 대학교 부교수는 매체 미어(meer) 인터뷰에서 "게임 원작 영화의 성패는 플레이 감정의 이식에 달려 있다"며 "왜 사람들이 그 게임을 플레이했는지, 무엇이 감정적으로 작용했는지를 이해하는 감독이 더 좋은 각색에 성공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