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란 전쟁이 발발한 이후 아시아 국가들의 통화가 전반적으로 약세를 보이고 있었지만 최근에는 개별 통화별로 강세와 약세가 다르게 나타나고 있다는 분석이 나왔다.
5만원권 지폐가 놓여 있다. ⓒ픽사베이
닛케이아시아는 18일 “인도와 필리핀 통화가 전통적으로 통화 강세 요인으로 꼽히는 고금리에도 약세를 면하지 못하고 있다”며 “반면 한국과 대만 통화는 AI·반도체 산업 호황에 힘입어 강세가 나타난다”고 보도했다.
닛케이아시아에 따르면 미국·이란 전쟁이 발발하면서 호르무즈 해협이 폐쇄된 영향으로 에너지 수입 의존도가 높은 아시아 국가들의 통화 가치는 전반적으로 하락세를 보여 왔다. 그러나 7월 말 이후에는 국가별로 통화 흐름이 뚜렷하게 엇갈리고 있다.
다이이치생명연구소의 니시하마 토루 수석연구원은 닛케이아시아와의 인터뷰에서 “반도체 관련 수출이 유가 상승에 따른 수입 비용 증가를 얼마나 상쇄할 수 있는지가 아시아 통화의 강세와 약세를 가른 요인”이라고 분석했다.
미국 경제복잡성관측소도 9월 분석에서 세계 주요 반도체 수출국의 통화가 강세를 보이고 있다고 평가했다.
인도 루피는 상장 IT기업이 많다는 산업적 특성에도 불구하고 반도체 호황의 수혜는 입지 못하는 것으로 분석됐다.
인도 루피는 7월 말 달러당 96루피 후반대까지 떨어지며 사상 최저치를 기록했다. 9월에는 달러당 96루피 초반대까지 회복했지만 상승 폭이 제한적이다.
니시하마 연구원은 닛케이아시아와의 인터뷰에서 “인도에는 상장 IT 기업이 많지만, 이들 가운데 상당수가 AI와 경쟁하는 서비스형 소프트웨어 사업에 집중하고 있다”며 “이 때문에 AI 및 반도체 관련 수요 증가에 따른 수혜를 받기 어려울 것”이라고 분석했다.
필리핀 페소 역시 17일 달러당 62페소 후반대까지 일시적으로 떨어지며 사상 최저치를 기록했다. 필리핀은 세계 8위의 반도체 수출국이지만 반도체가 전체 수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3%에 불과하다.
반면 한국 원화와 대만 달러는 강세를 보이고 있다. AI 산업 호황으로 반도체 수출이 크게 늘어난 영향이다.
한국 산업통상자원부에 따르면 8월 한국의 수출액은 약 982억5천만 달러(약 136조 원)로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68.7% 증가했다. 대만 재정부에 따르면 8월 대만의 수출액은 824억 달러(약 114조 원)로 지난해 같은 기간에 비교해 41% 증가하며 월간 기준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다. 반도체와 메모리 수출이 크게 늘어난 데 따른 결과다.
싱가포르와 말레이시아의 화폐 역시 반도체 관련 수출이 크게 늘면서 가치가 상승하고 있다.
반도체 산업 호황에 대한 기대감으로 투자가 늘어난 점도 통화 가치 상승으로 이어졌다. 한국은 1~6월 외국인 직접투자 유치액이 142억8천만 달러(약 19조8천억 원)로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9% 증가했다. 대만은 89억 달러(약 12조3천억 원)를 유치해 21% 증가했으며, 7월 이후 증가세가 더욱 가팔라졌다.
일본 노무라증권의 하루이 신야 외환 분석가는 닛케이아시아에 “추가 성장에 대한 기대감으로 투자금 유입이 이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일반적 통념에 따르면 고금리 정책을 유지하거나 금리를 인상하는 국가의 통화는 강세를 보인다. 그러나 현재 아시아 통화 시장에서는 이러한 흐름이 나타나지 않고 있다. 인도의 정책금리는 5.25%, 필리핀은 5%인 반면 한국은 3%, 대만은 2%다.
필리핀 중앙은행은 인플레이션을 억제하기 위해 8월까지 세 차례 연속 금리를 인상했다. 인도에서도 인플레이션 억제를 위한 추가 금리 인상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그러나 두 국가의 통화에는 강한 매수세가 나타나지 않고 있다.
하루이 분석가는 “금리 인상 중에서도 한국처럼 AI 산업의 호실적에 힘입어 금리를 올리는 경우에는 경제가 강하다는 신호로 받아들여져 통화 매수 요인이 된다”며 “반면 인플레이션 억제만을 목적으로 한 금리 인상은 통화 가치를 크게 끌어올리기 어려울 것”이라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