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근 KB금융지주 글로벌부문장 겸 WM·SME부문장은 차기 회장 최종 후보로 선정된 이후 첫 기자간담회에서 이렇게 말했다. 사상 최대 실적을 낸 현직 회장이 연임에 실패하면서 '변화와 세대교체'의 기수로 발탁된 인물의 입에서 가장 먼저 나온 단어가 '계승'이었던 셈이다.
다가오는 올해 연말 KB금융지주 계열사 CEO 인사에서 이재근 부문장이 그리고 있는 KB금융그룹의 방향을 읽을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그래픽 허프포스트코리아
물론 변화 의지를 보이지 않은 것은 아니다. 이재근 부문장은 같은 자리에서 "국내 1등에 안주하지 말라는 메시지로 받아들인다", "향후 3~5년이 그룹의 운명을 가르는 시기"라며 방향 전환의 필요성과 의지도 분명히 밝혔다. 계승과 변화를 모두 담고 있는 셈이다.
'계승'과 '변화' 가운데 어느 쪽에 더 무게가 실릴지, 연말 계열사 인사는 처음으로 구체적 모습을 드러낼 것으로 보인다.
KB금융그룹 11개 계열사 가운데 10곳의 대표가 올해 말 임기 만료를 앞두고 있고, 이재근 부문장의 정식 취임(11월20일 임시주주총회)과 첫 인사 시기가 사실상 겹친다.
관전 포인트는 크게 네 가지다. 이 가운데 셋은 '사람'을 바꾸는 문제, 하나는 '틀'을 바꾸는 문제다.
◆ 양종희 '6/9'·진옥동 '전원 유임'·임종룡 '전원 교체', 이재근의 인사는 어디에
18일 금융권에 따르면 이번 연말 인사에서 대표이사 교체 대상에 오른 KB금융그룹 계열사는 10곳에 이른다. 구체적으로 KB국민은행, KB증권(WM부문), KB부동산신탁, KB데이타시스템, KB손해보험, KB국민카드, KB라이프생명, KB캐피탈, KB자산운용, KB인베스트먼트 등이다.
현재 금융권의 관심은 이들 열 개의 계열사 CEO 가운데 과연 몇 곳의 CEO가 바뀌는지에 쏠려 있다. 금융지주 회장이 바뀐 뒤 첫 인사는 새 수장의 시선이 계승과 변화 가운데 어느쪽을 향해 있는지 보여주는 이정표가 된다.
양종희 현 KB금융지주 회장은 2023년 취임 첫해 임기 만료 계열사 대표 9명 가운데 6명을 교체하며 쇄신에 나섰다. 임종룡 우리금융지주 회장은 최종 후보로 낙점된 뒤 정식 취임 직전 인사에서 임기 만료 CEO 9명을 전원 교체했다.
반면 진옥동 신한금융지주 회장은 취임 후 첫 인사에서 임기 만료를 맞은 자회사 CEO 9명을 전원 연임시켰다.
금융권에서는 이 부문장이 변화와 계승이라는 두 가지 키워드를 모두 선택한 것처럼, 이 부문장 체제에서 치러질 올해 연말 계열사 CEO 인사에서도 '교체'와 '유임'이라는 두 가지 압력이 모두 존재한다는 평가가 나온다.
KB금융지주 회추위가 사상 최대 실적의 현직 회장 대신 '변화와 세대교체'를 명분으로 이재근 부문장을 선택했다는 점에서 교체 폭을 키울 압력, 그리고 이재근 부문장이 양종희 회장 시절 힘을 키워온 내부 인사인 데다가 양 회장 체제에서 KB금융그룹이 좋은 성적을 냈다는 점에서 교체 폭을 제한할 압력이 동시에 존재하다.
관건은 인사 규모 자체가 아니라 그 규모를 어떻게 읽느냐일 수도 있다. 대규모 교체가 일어나더라도 성과 부진에 따른 교체인지, 연임 CEO들의 '2+1년' 임기 만료가 우연히 겹친 구조적 결과인지, 세대교체 의지의 발현인지를 구분하는 일 자체가 하나의 관전 포인트가 될 수 있다.
◆ 연상·선배 CEO들의 거취에도 시선 집중, 핵심 계열사에 1970년대생 앉힐까
이재근 부문장은 첫 기자간담회에서 인사 원칙으로 나이는 중요하지 않다는 뜻을 보였다. 이 부문장은 "나이에 국한하지 않고 역량에 기반해 전문성, 직원과의 호흡, 조직원의 헌신을 이끌어낼 리더가 누구인지 고민하겠다"고 말했다.
특기할 만한 점은 회추위가 그를 최종 후보로 내세운 명분이 세대교체라는 것이다.
두 메시지가 미묘하게 어긋나는 지점에서, 이재근 부문장보다 나이가 많은 CEO들의 거취, 그리고 은행·증권·보험·카드 등 핵심 계열사에 1970년대생 CEO가 등장할지가 또 하나의 관전 포인트가 된다. 현재 KB금융 계열사 CEO 가운데 1970년대생은 윤법렬 KB인베스트먼트 대표(1972년생) 한 명뿐이다.
이재근 부문장보다 나이가 많은 CEO는 모두 4명이다. 이환주 국민은행장이 1964년생으로 두 살 연상, 이홍구 KB증권 WM부문 대표이사 사장과 성채현 KB부동산신탁 대표이사 사장, 박찬용 KB데이타시스템 대표이사 사장이 1965년생으로 한 살 연상이다.
금융권 경력으로 따지면 이홍구 사장(1990년 현대증권), 이환주 행장(1991년 주택은행), 그리고 김재관 KB국민카드 대표이사 사장(1992년 국민은행) 등 3명이 1993년 주택은행에 입행한 이재근 부문장보다 선배다. 나이와 경력, 두 기준에 모두 걸리는 인물은 이환주 행장과 이홍구 사장이다.
이 가운데 가장 상징적 자리는 국민은행장이다. 이환주 행장은 1966년생 이재근 부문장보다 두 살 위인 데다가 주택은행 입행 선배이기도 하다. 세대교체를 앞세운 인사에서 은행장이 회장보다 나이와 경력이 모두 많은 구도가 유지될지에 이목이 쏠리고 있다.
◆ 증권은 웃고 손보는 울었다, 엇갈린 성적표 인사의 잣대로 쓰일까
'역량 기반 인사'를 표방한 이상, 계열사 성과가 실제 잣대로 작동하는지 역시 관전포인트 가운데 하나가 될 것으로 보인다.
KB금융그룹 계열사들의 상반기 성적표는 극명하게 갈렸다.
KB증권은 상반기 순이익 7963억 원으로 전년 대비 135% 늘며 반기 기준 최대 실적을 냈다. KB캐피탈과 KB자산운용도 순이익이 증가했다. 반면 KB손해보험은 장기·자동차보험 손해율 상승으로 상반기 순이익이 4788억 원에 그치며 전년 동기보다 14.2% 줄었다.
부진한 계열사 대표를 성과 기준으로 냉정하게 처리한다면 '시스템 인사'의 신호인 동시에 비은행 포트폴리오 재정비 의지로도 읽힐 수 있다. 반대로 성과와 무관하게 유임 폭이 넓다면 양종희 회장의 KB를 '계승'하는 방향으로 방점이 찍힌 것으로 해석될 여지가 크다.
다만 증시 호황과 국내외 거래대금 증가가 KB증권 실적 급증의 중요한 배경이었다는 점은 실적과 함께 봐야 할 대목이다. 성과 평가가 사이클 효과와 경영 역량을 어떻게 구분하는지 역시 이재근 부문장의 인사 철학을 드러내는 단면이 될 수 있다는 시선이 나오는 이유다.
◆ 이재근 예고한 '분권화', 연말 CEO 인사에서 어떤 방식으로 반영될까
앞의 세 가지 관전포인트가 '사람'을 바꾸는 문제라면, 네 번째는 '틀'을 바꾸는 문제다. 이재근 부문장이 기자간담회에서 가장 힘줘 말한 대목이 바로 조직 운영 방식이었다.
이 부문장은 "회장의 힘이 편중돼 집중되기보다는, 큰 조직인 만큼 프로세스와 시스템으로 움직이는 조직을 지향한다"며 "한 사람 특정인의 개인기에 따라 움직이는 조직이 아니라, 시스템과 프로세스로 움직이는 분권화되고 지속 가능한 조직에 중점을 두겠다"고 했다.
계열사 인사 방식을 두고도 "회장이 전부 힘을 갖고 하기보다 시스템으로 움직여야 한다"며 "대표이사후보추천위원회(대추위)라는 이사회 소위원회에서 함께 논의해 결정할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주목할 점은 그가 회장으로서 첫 인사에 임하는 '타이밍'이다. 취임 직후 대추위를 직접 이끌게 될 것으로 예상되는 이 시점에 어떤 방식으로든 지배구조에 손을 댈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회장 권한을 대추위·이사회, 그리고 각 계열사들의 임원후보추천위원회로 분산하는 운영 방식의 변화가 관측된다면 이재근 부문장의 '분권' 선언에 좀 더 힘이 실릴 가능성이 높다.
실제 KB금융지주는 은행 사외이사로 구성된 국민은행 은행장후보추천위원회(행추위)에 은행장 후보 추천권을 부여하는 방안을 추진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현재는 지주 자회사대표이사후보추천위원회(자추위)가 후보를 추천하면 행추위가 자격을 검증한 뒤 최종 추천하는 구조다.
외부 환경도 KB금융지주의 변화를 부추기고 있다. 금융당국은 금융지주 대표이사 연임 요건 강화와 이사회 독립성 제고를 추진해 왔고, 은행장 선임 과정에서 은행 임원후보추천위원회의 의견이 충분히 반영되지 않는다는 지적(하나금융 사례)도 내놓은 바 있다.
이찬진 금융감독원장은 15일 임원회의에서 "대부분 금융지주의 자회사 CEO 승계 절차가 미흡하다"며 "후보군 선정부터 검증·평가, 관련 기록 등 승계 절차 전반의 투명성과 공정성을 강화하겠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