앤트로픽과 오픈AI를 포함한 미국의 생성형 인공지능(AI) 선도기업뿐 아니라 AI 생태계 전반을 아우르는 마이크로소프트까지 ‘AI 속도 조절론’에 무게를 더하고 있다.
이에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를 둘러싸고 AI 속도전이 둔화한다면 메모리 반도체 수요가 지금처럼 급증하지 않을 수 있다는 우려도 커지는 흐름이다.
AI 패권 다툼, 대중화 등의 측면에서 중국이 AI 시장 확대의 주요 요인으로 떠오른 가운데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하반기 실적발표에서 나올 메모리 반도체 수요와 가격 움직임이 AI 속도 조절론의 현실화 여부를 보여줄 것으로 예상된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인공지능(AI) 속도 조절론' 속에서 불거지는 메모리 반도체 수요 둔화를 빗겨갈 수 있을까. ⓒAI생성이미지
9월15일 반도체업계 안팎에 따르면 전날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주가가 20여 일 만에 최대 낙폭을 보인 가운데 하락의 원인으로 지목되는 AI 속도 조절론에 계속해서 힘이 실리고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삼성전자는 전날 4.24% 하락한 24만8500원에 거래를 마쳤다. 8월24일 8.70% 급락한 이후 가장 큰 하락 폭을 보였다. SK하이닉스도 7.12% 빠진 168만3천 원으로 장을 마감했는데 이는 8월19일 9.75% 떨어진 이후 처음으로 5% 이상 주가가 내린 것이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주가 하락은 AI 산업 리더들이 잇따라 개발 속도를 늦춰야 한다고 입을 모은 데 따른 것으로 분석된다. 그리고 이날도 마이크로소프트(MS)가 속도 조절론에 불을 지폈다.
14일(현지시각) MS는 홈페이지에 “MS AI는 ‘인간이 AI보다 중요하다’는 단순한 전제에서 시작한다”는 내용을 포함한 행동강령을 공개했다. MS는 이 행동강령에 인간을 최우선으로 삼아 설계하고 인간의 필요에 기반을 두며 인간의 지침에 따라 생성된 AI 모델을 훈련시키고 배포하겠다는 의지가 담겼다고 짚었다.
이 행동강령에 따르면 MS의 AI 모델은 인간의 승인된 범위 안에서만 작동하고 스스로 행동하는 데 제약이 걸린다. AI는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언어로 상호 소통하는 행위도 금지된다. MS는 인간과 다르게 AI가 의식을 갖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무스타파 술레이만 MS AI 최고경영자(CEO)는 미국 CNBC와 인터뷰에서 행동강령을 5개월 전부터 준비해 왔고 최근 AI 속도 조절 논의를 고려해 이날 지침을 발표하기로 했다고 설명하기도 했다.
전날에는 다리오 아모데이 앤트로픽 CEO를 필두로 샘 올트먼 오픈AI CEO, 일론 머스크 스페이스X CEO, 데미스 허사비스 구글 딥마인드 CEO가 잇따라 AI 속도 조절론에 동참했다.
경쟁 관계에 놓인 업계 리더들이 자신들에게 긍정적인 시장 확장과 반대되는 논의에서 의견을 모은 것이 이례적이었던 만큼 이는 메모리 반도체 수요 감소로 이어져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에 부정적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우려가 확산하는 것으로 파악된다.
지금까지도 AI 버블(거품)론, 메모리 가격 폭등 및 전방산업에서의 메모리 용량 축소 움직임 등에 메모리 수요가 고점에 이르렀다는 분석이 나왔는데 속도 조절 우려까지 더해지며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내리막길을 걸을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이민희 BNK투자증권 연구원은 15일 반도체산업 보고서에서 “제조사들이 낙관적 전망 속에 높아진 수요 증가율 수준에 맞춰 경쟁적으로 증설을 추진하고 있다”며 “오히려 지금은 거시 환경이 불확실해지고 있고 메모리 가격도 더 오르기 힘든 상황에서 높은 가격에 수요를 더 늘리지 못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이 연구원은 보기 드물게 반도체업종에 투자의견으로 중립(Neutral)을 제시했고 기업별 목표주가는 삼성전자 27만 원, SK하이닉스 148만 원을 설정했다. 다른 증권사의 목표주가 최고치와 비교하면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부정적 전망을 내놓은 것이다.
다만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메모리 반도체 수요는 중국이 촉발할 시장 확장성에 방어가 가능할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현재 불거진 AI 속도 조절론이 현실화하기 가장 큰 어려움으로는 미국과 중국의 패권다툼이 꼽힌다.
중국이 AI 시장 경쟁에 사활을 걸고 있는 상황에서 미국 정부와 기업들이 자발적으로 기술개발의 속도를 늦출 수 있느냐는 지점이다. 만약 두 나라가 ‘인간을 위해’ AI 개발 규제에 합의하더라도 상대국을 향한 불신 탓에 합의 내용을 지키지 않는, 이른바 ‘죄수의 딜레마’가 작용해 AI 개발 경쟁이 멈추지 않을 가능성이 큰 것이다.
아모데이 CEO가 속도 조절을 강조하면서도 죄수의 딜레마 현상이 변수라고 인정했고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AI의 전략적 중요성과 함께 중국에 앞서는 현재 상황을 유지해야 한다고 더 강경한 태도를 보였다.
별도로 중국은 미국만큼이나 AI 전반에 투자를 강화하며 메모리 수요를 끌어올리고 있어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수혜를 볼 것이라는 예상이 많다. 또 AI 기술력 측면에서 미국이 상단을 열고 중국이 대중화를 선도할 것이라는 관측도 시장 자체를 키워 메모리 수요를 높이는 요소로 분석된다.
현재 CXMT 등이 중장기적으로 고대역폭메모리(HBM) 시장까지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대항마로 여겨지는 점, 과거 두 기업이 미국과 중국의 반도체 패권 다툼 탓에 중국 사업의 의존도를 낮춰야 하는 압박을 받은 점 등 우리 기업들은 중국과 관련해 얻는 부정적 영향이 적지 않았다. 반면 시장 확대라는 관점에서는 중국이 불러다 주는 기회가 긍정적으로 작용하는 셈이다.
시장 외부에서 제기된 AI 버블론과 다르게 속도 조절론은 선도기업 리더들이 직접 주창했다는 점에서 우려가 더 크게 다가온다는 평가가 나온다.
이에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우려를 불식하기 위한 분기점은 10월과 내년 1월에 진행될 잇따른 하반기 실적발표가 될 것으로 예상된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고객사들이 수요를 줄이거나 메모리 가격 상승세가 급격히 꺾이는 움직임이 실적발표를 통해 나타난다면 메모리 반도체기업을 향한 우려는 실제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반대로 해석하면 아직 반도체 수요는 강하고 가격 역시 강세를 보일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한 상황이다.
시장조사기관 트렌드포스에 따르면 2분기 글로벌 D램 산업 매출은 1547억3천만 달러(약 210조 원)로 1분기보다 59.5% 증가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핵심 경쟁력인 HBM의 내년 가격은 올해보다 최소 70% 오를 것으로 전망됐다.
김두언 하나증권 연구원은 14일 글로벌 매크로·투자전략 보고서에서 “현재까지 하드웨어 주문과 매출의 변곡점을 만들었다는 증거가 없다는 것이 중요하다”며 “신규 주문, 메모리 가격 하락이 함께 나타난다면 경계해야 하지만 아직 징후는 없다”고 바라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