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도 자지 않고, 밥을 먹지도 않는다. 방송을 끄고 휴식을 취할 필요도 없다. 시청자가 말을 걸면 대답하고, 질문을 던지면 맥락에 맞춰 반응한다. 지금까지 인터넷 방송의 기본 전제였던 ‘사람이 직접 방송한다’는 공식이 인공지능(AI)의 발전으로 흔들리고 있다.
인공지능(AI) 버튜버에 열광하는 사람들. AI로 생성한 이미지.
버튜버 '미로'가 최근 유튜브 라이브와 방송 플랫폼 '치지직'을 무대로 약 3일간 실시간 방송을 이어갔다고 IT 전문 매체 바이라인네트워크가 14일 전했다. 약 63시간 동안 이어진 방송에서 미로는 시청자의 채팅에 반응하고 대화를 나누며며 일반적인 인터넷 방송인과 유사한 형태로 콘텐트를 진행했다.
버튜버는 '버추얼 유튜버(Virtual YouTuber)'를 줄인 말로, 실제 방송인의 얼굴 대신 가상의 캐릭터가 등장해 방송하는 인터넷 방송인을 뜻한다. 카메라나 모션캡처 장비 등을 활용해 사람의 움직임과 표정을 가상 캐릭터에 입히는 방식이 일반적이다.
국내에서도 버튜버는 2020년대 초반부터 빠르게 대중화됐다. 대표적으로 국내 버튜버 시장을 이끈 사례로 꼽히는 '이세계아이돌(이세돌)'은 멤버 전원이 유튜브 구독자 25만~31만 명대를 기록하며 상당한 팬덤을 구축했다.
하지만 기존 버튜버에는 변하지 않는 전제가 하나 있었다. 화면에 등장하는 것은 가상의 캐릭터지만, 그 뒤에는 실제 사람이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방송인은 직접 말을 하고, 시청자의 반응을 살피며, 적절한 순간에 웃거나 감정을 표현해야 했다. 캐릭터가 가상일 뿐 방송의 본질은 결국 인간의 실시간 소통이었다.
그렇다면 '미로'는 정말 63시간 동안 단 한 번도 쉬지 않고 방송을 이어간 것일까. 사람이라면 불가능에 가까운 기록이다. 잠을 자지도, 식사를 하지도 않은 채 사흘 가까이 시청자와 대화를 이어가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에는 반전이 있다. 63시간 동안 방송을 이어간 주체가 애초에 사람이 아니었던 것이다. '미로'는 사람의 개입 없이 스스로 방송을 진행하는AI 버튜버다.
기존 버튜버가 가상의 캐릭터 뒤에서 사람이 직접 말하고 행동하는 방식이었다면, AI 버튜버는 시청자가 채팅이나 음성으로 말을 걸면 이를 대규모 언어모델(LLM) 등에 전달하고, AI가 질문의 맥락과 앞선 대화 내용을 분석한 뒤 캐릭터의 말투와 성격, 설정에 맞춰 답변을 만들어내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여기에 합성 음성과 가상 캐릭터의 움직임을 결합하면 실제 사람이 진행하는 방송과 비슷한 형태의 실시간 소통이 가능해진다.
이 분야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사례 중 하나가 영국 소프트웨어 엔지니어 잭 베달(Jack Vedal)이 만든 AI 버튜버 '네루사마'다. 네루사마는 개인 방송을 넘어 다른 버튜버와 함께 방송하는 이른바 '합방'까지 진행하며 상호작용 능력을 보여줬다. 합성 음성을 활용해 노래를 부르는가 하면, '마인크래프트' 같은 게임을 직접 플레이하면서 콘텐츠에 대응하는 모습도 선보였다.
영국의 소프트웨어 엔지니어 잭 베달이 생성한 AI 버튜버 '네루사마'가 라이브 방송을 진행하고 있다. ⓒ유튜브 캡쳐
이 같은 변화는 엔터테인먼트 업계에도 적지 않은 파장을 일으킬 수 있다. 인간 방송인은 체력과 시간이라는 물리적 한계를 갖지만 AI는 상대적으로 자유롭다.
김광민 언엑스 대표는 AI 유튜버의 차별점으로 끊임없이 방송을 이어갈 수 있다는 점과 이용자를 개별적으로 기억할 수 있다는 점, LLM의 예측 불가능성에서 비롯되는 재미 등을 꼽았다. 해외 진출 과정에서 다양한 언어를 구사하거나 물리적 제약 없이 여러 장소에서 동시에 활동할 수 있다는 점 역시 AI 버튜버의 장점으로 제시된다.
물론 AI가 당장 인간 방송인을 대체할 수는 없다. 현재의 AI 버튜버는 맥락에 맞지 않는 답변을 내놓거나, 교묘하게 왜곡된 답변을 유도하는 채팅에 취약한 모습을 보인다. '미로' 역시 장시간 방송이 가능하다는 강점과 별개로 인간 방송인과 비교하면 아직 미숙한 반응이 눈에 띈다.
그럼에도 이 같은 흐름은 이미 사람들이 AI를 단순한 도구가 아닌 '대화 상대'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는 점으로 읽힌다.
미로를 제외하고 현재 국내에서 유명한 AI 버튜버로 꼽히는 '루미'와 '시로'가 등장하는 채널의 영상 댓글에서도 시청자들의 높은 몰입도를 확인할 수 있다. '너무 귀여워서 납치하고 싶다', '루미 때문에 버튜버를 왜 보는지 알게 됐다'는 등의 반응이 이어지는 등 AI라는 사실을 인지하면서도 캐릭터에 강하게 동화되는 모습을 보였다.
게임 '이터널 리턴'의 캐릭터를 기반으로 만든 AI버튜버 '루미'는 유튜브 채널에 1만 명이 넘는 구독자를 보유하고 있다. ⓒ유튜브 홈페이지
한편 미국 성인 인터넷 이용자의 27%가 챗GPT와 클로드 등 AI와 의미 있는 감정적·사회적 상호작용을 한다고 응답한 조사 결과도 있다. 한국에서도 AI를 인간관계의 보조 수단으로 활용하는 현상이 확산하고 있다.
또한 2026년 한국 청년 고립 보고서에 따르면 3개월 이상 정서적 고립을 겪은 '고위험군' 청년 비율은 2022년 14.5%에서 2026년 16.9%로 증가했다. 특히 고립 경험이 있는 청년의 72.3%는 감정 관리나 고민 상담을 위해 AI를 이용한 경험이 있다고 답했다.
조성준 강북삼성병원 정신의학과 교수는 병원 공식 채널에서 "AI와만 관계를 형성하다가 진짜 인간 관계를 등한시하게 되는 경우가 우려가 되기도 한다"며 "AI가 주는 완벽한 공감에 익숙해질수록 갈등과 조율이 필수적인 현실 인간관계를 더욱 기피하게 만들고, 결과적으로 개인의 현실적 고립을 심화시키는 부작용을 낳을 수 있다"고 전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