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미국 중간선거를 두 달 앞두고 경유(디젤) 가격이 사상 최고치로 치솟자 갑자기 러시아 석유 수출길을 열기 위해 나섰다.
트럼프 대통령은 우크라이나 전쟁에 따른 러시아 제재의 일환으로 러시아산 석유를 사는 나라에 최대 50% 관세를 매기겠다고 공언해왔다.
하지만 이번엔 우크라이나에 "러시아 정유시설 공격을 멈추라"고 요구하고 나섰다. 국제유가를 낮추려면 러시아 석유가 시장에 나와야 하기 때문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 로이터=연합뉴스
트럼프 대통령은 13일(현지시간) 아일랜드 서부 둔베그를 방문한 자리에서 취재진에게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러시아의 디젤연료 시설을 파괴하는 행위를 중단해야 한다"고 말했다고 AFP통신이 전했다.
트럼프, 이란전쟁의 수렁에 빠지나 '러시아 감싸기'로 반전
트럼프 대통령의 이번 발언은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통화한 직후 나온 것으로 알려졌다.
트럼프 대통령은 젤렌스키 대통령과도 이 문제를 논의했다며 "다른 목표물은 얼마든지 있으니 디젤 연료는 타격하지 말라"며 "그것이 전 세계에 피해를 주고 있다"고 강조했다.
우크라이나는 최근 장거리 드론으로 러시아 정유시설을 잇달아 타격해왔는데, 이 때문에 러시아 내 휘발유·경유 생산이 줄면서 자국은 물론 국제 유가시장에도 연료부족 여파가 번지고 있다는 게 트럼프 대통령의 주장이다.
앞서 트럼프 대통령이 불과 한 달 전까지 정반대 논리를 폈다.
트럼프 행정부는 올해 8월 러시아산 원유를 수입한다는 이유로 인도에 25%의 '2차 관세'를 부과해 총 관세율을 50%까지 끌어올렸다. 러시아의 전쟁 자금줄인 석유 수출을 막아 우크라이나 침공에 대한 대가를 치르게 하겠다고 공언했다.
그랬던 트럼프 대통령이 이제는 러시아의 석유 생산 시설 지켜기에 나섰다. 자신이 일으킨 미국-이란 전쟁의로 국제유가가 뛰고, 이는 곧바로 미국 중간선거에서 불리한 요인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 ⓒ 연합뉴스
트럼프 대통령의 태세전환 배경에는 미국 내 경유 가격 급등이 자리잡고 있다.
서민 물가와 직결되는 미국 경유 가격은 최근 갤런(1갤런=3.785리터)당 6달러를 넘어서며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다.
앞서 트럼프 대통령이 촉발한 이란 전쟁으로 호르무즈 해협 통행이 위협받으며 국제유가가 배럴당 120달러 가까이 치솟았던 전례가 있는 만큼, 이번 경유 파동까지 겹치면 11월 중간선거를 앞둔 여당에 정치적 부담이 커질 수밖에 없다.
실제로 로이터는 올해 3월 트럼프 대통령이 유가 안정을 위해 러시아에 대한 석유 제재 완화와 전략비축유 방출을 검토하고 있다고 보도한 바 있다.
이번 우크라이나를 향한 '러시아 경유시설 공격자제' 요구 역시 같은 맥락으로, 러시아산 원유·석유제품의 국제 시장 공급을 사실상 유지시켜 유가를 낮추려는 시도로 읽힌다.
이집트 알아람을 비롯한 외신은 트럼프 대통령이 이날 자신이 초래한 이란과의 갈등이 아니라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을 유가 상승의 원인으로 지목했다고 전하며, 책임 소재를 둘러싼 트럼프 대통령의 발언이 오락가락하고 있다고 짚었다.
우크라이나 입장에서는 트럼프 대통령의 태도변화가 곤혹스러울 것으로 보인다. 정유시설 타격은 러시아의 전쟁 수행 능력을 약화시키는 핵심 전술 중 하나였는데, 우크라이나의 최대 후원국인 미국이 이를 자제하라고 압박하면서 전장의 셈법 자체가 복잡해졌기 때문이다.
러시아를 제재하겠다던 트럼프 대통령의 구호와, 유가안정을 위해 러시아 석유 공급을 지켜주려는 실제 행보 사이의 간극은 앞으로 미국의 러시아-우크라이나 정책의 일관성을 둘러싼 논쟁으로 번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