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친구는 몇 명일까.” 막상 세어보려니 손가락이 쉽게 접히지 않는다. 몇 명인지 헤아리기 전에 ‘어디까지를 친구라고 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이 먼저 따라붙는다.
안다고 다 친구는 아니다. 친구의 숫자보다 누구를 친구로 남길지가 중요해졌다. 친구가 많을수록 인맥이 넓고, 넓은 인맥이 곧 자산이라는 오래된 셈법도 달라지고 있다.
친구들과 찍은 사진을 바라보는 사람. AI합성 이미지
#. “예전에는 인맥이 곧 정보력이었습니다. 누구를 아느냐에 따라 얻을 수 있는 정보의 깊이와 속도가 달랐죠. 하지만 지금은 굳이 사람을 만나지 않아도 유튜브와 AI를 통해 웬만한 정보는 손쉽게 얻을 수 있습니다. 과거에는 정보를 얻기 위해 사람을 만났다면, 이제는 정보만으로는 사람을 만날 이유가 부족해진 시대입니다.” (안아무개씨·55)
#. “일과 가정을 챙기기도 빠듯한데 친구를 만나 술 마시고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하는 데까지 시간을 쓰는 게 이제는 좀 소모적으로 느껴져요. 시간이 남는다면 자기계발이나 취미처럼 온전히 저를 위한 데 쓰고 싶고요. 오히려 운동이나 취미를 하면서 만난 사람들은 굳이 서로의 개인사를 깊이 알 필요가 없잖아요. 함께 좋아하는 걸 즐기면 되고, 그만큼 부딪힐 일도 적어서 인간관계에서 오는 스트레스도 덜한 것 같아요.” (오아무개씨·42)
#. “저는 친구가 정말 없는 편이에요. 사람과도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지내고요. 마음이 맞지 않으면 굳이 친구가 되려고 애쓰지 않아요. 안 맞는 사람과 억지로 어울리는 게 오히려 스트레스더라고요. 그럴 바에는 혼자 지내는 게 삶의 질에는 더 낫다고 생각해요.” (김아무개씨·35)
#. “친구를 만나 이야기하는 건 좋지만 오래된 친구라도 서로 생각이나 가는 방향이 너무 달라지면 대화가 예전처럼 재미있지 않고 가끔 씁쓸할 때도 있더라고요. 그래서 억지로 관계를 이어가기보다는 정말 이야기가 잘 통하는 소수의 친구만 만나려고 해요.” (박아무개씨·28)
시장조사 전문기업 엠브레인 트렌드모니터가 지난 8월12~18일 전국 만 19~59세 남녀 1천 명을 대상으로 실시해 1일 발표한 ‘2026 친구 관련 인식 조사’를 보면, 현재 친구가 ‘3명 미만’이라는 응답이 38%로 가장 많았다. 2023년 33.1%에서 4.9%포인트 늘었다. 친구가 ‘10명 이상’이라는 응답은 같은 기간 9.4%에서 6.4%로 줄었다.
친구는 줄었지만 외로움은 커지지 않았다. ‘친구가 없어서 외롭다’는 응답은 2023년 11.5%에서 올해 11.6%로 거의 비슷했다. 친구가 적어진 것을 곧 관계의 결핍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의미로 풀이된다.
친구를 바라보는 기준도 달라졌다. ‘친구는 많을수록 좋다’는 응답은 2023년 31.5%에서 올해 23.4%로 떨어졌다. 반면 ‘진실한 친구 딱 한 명이면 충분하다’는 응답은 51.8%에서 58.1%로 높아졌다. 얼마나 많이 아느냐보다 누구와 깊게 연결돼 있느냐가 중요해진 셈이다.
이런 변화는 삶의 중심이 ‘타인’에서 ‘나’로 이동하는 흐름과도 맞물린다. 트렌드모니터가 지난 8월19~21일 전국 만 13~59세 남녀 1천 명을 대상으로 실시해 10일 발표한 ‘2026 나, 타인에 대한 관심 및 평판 관련 인식 조사’에서 ‘나 자신’에 대한 관심도는 73.7%였다. ‘타인’에 대한 관심도는 43.9%에 그쳤다. 인간관계가 ‘소수의 몇 명만 있어도 충분하다’는 응답은 74.9%, ‘혼자 시간을 보내는 게 편하다’는 응답도 73.5%였다. 관계가 싫어진 게 아니라 내 시간과 감정을 누구에게 쓸지 신중해진 것이다.
친구 관계를 유지하는 데 드는 ‘감정 비용’도 무시하기 어렵다. 친구 관련 조사에서 67.2%는 ‘친구 관계도 유지에 드는 감정적 에너지가 부담스러울 때가 있다’고 답했다. ‘연락을 유지하는 것 자체가 감정적으로 소모적일 때가 있다’는 응답도 52.9%였다. 약속을 잡고 연락을 이어가고 상대의 기분을 살피는 일까지, 관계에는 시간과 돈뿐 아니라 감정도 들어간다. 모든 관계에 같은 에너지를 쏟기보다 ‘내 사람’에게 집중하려는 이유다.
"내 친구는 몇 명일까?" AI합성 이미지
해외에서도 친구 관계의 비용에 주목하고 있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는 2025년 8월15일 친구 관계를 유지하는 데 들어가는 비용이 커지는 현상을 물가 상승을 뜻하는 ‘인플레이션’에 빗대 ‘프렌드플레이션(friendflation)’이라고 소개했다. 결혼식과 파티, 여행 등 친구와 함께하는 경험의 비용이 높아지고 SNS를 통해 만남을 보여줘야 한다는 압박까지 더해지면서 우정을 유지하는 경제적 부담이 커지고 있다는 분석이다.
친구 관계가 좁아지는 흐름 역시 한국만의 현상은 아니다. AP통신은 2025년 12월18일 미국 사회의 ‘사회적 단절’을 다루며 미국인들이 과거보다 친구가 적고, 시민단체나 종교 공동체 등에 참여하는 비율도 낮아졌다고 전했다. 보도에 인용된 조사에 따르면 가까운 친구가 6명 이상이라는 미국 성인은 약 4명 중 1명으로, 1990년에는 거의 절반에 달했던 것과 비교해 크게 줄었다.
다만 국내 조사에서 눈에 띄는 것은 관계의 축소가 반드시 외로움의 증가로 이어지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관계를 끊어내기보다 자신에게 필요한 관계를 골라 남기는 변화로 보인다.
그렇다고 혼자만 살겠다는 것도 아니다. ‘관계를 맺어야 한다는 사회적 압박보다 필요할 때 연결될 수 있다는 안정감이 더 중요하다’고 76.6%가 답했고, 원할 때 참여하고 부담 없이 빠질 수 있는 ‘느슨한 형태의 모임’을 선호하는 사람도 72%에 달했다.
이런 관계의 취향은 모임의 방식도 바꾸고 있다. 이름도, 나이도, 직업도 굳이 묻지 않는다. 최근에는 ‘신상 질문 금지’를 내걸고 닉네임만으로 어울리는 ‘익명 기반 동호회’도 등장하고 있다. 깊은 관계는 더 깊게, 가벼운 관계는 부담 없이, 관계를 없애는 대신 서로의 거리를 조절하는 것이다.
친구의 의미도 바뀌었다. ‘솔직한 각자의 감정을 주고 받을 수 있는 사람(88.2%)’, ‘아주 가끔 연락해도 반가운 마음이 드는 사람(86.3%)’이 가장 높게 나타났다. 얼마나 오래 알고 자주 만났는지보다 지금의 나와 얼마나 잘 통하는지가 중요해진 것이다.
이제는 넓게 사귀기보다 깊게 사귀고, 마음 맞는 몇 사람에게 시간과 감정을 쓰고, 나머지 관계는 필요할 때 가볍게 잇는다. 결국 친구가 몇 명이냐보다 누구를 친구로 남길 것인가. 인맥의 크기보다 관계의 농도를 따지는 시대가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