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이나가 국방예산 부족분을 메우기 위해 270억 달러(한화 약 36조 원)의 추가 지원을 유럽에 요청했다.
안 그래도 지친 유럽 후원국들 사이에서는 '돈이 정말 필요해서인가, 관리 실패 탓 아닌가'라는 의구심이 커지고 있다. 우크라이나에서 최근 국방조달 부패스캔들이 터진 탓이다. 무엇보다 미국이 발을 빼면서 재정 지원의 무게가 고스란히 유럽 쪽으로 넘어온 상황에서 유럽연합의 고민이 깊어지고 있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 ⓒ EPA=연합뉴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지난달 유럽 및 영국 지도자들과 함께한 회의에서 "올해를 넘기기 위해 270억 달러가 더 필요하다"고 요청했다고 9일(현지시각) 외신들이 전했다.
유럽연합이 이미 올해 초 1천억 달러(약 133조 원) 이상의 대출 지원을 확정해 둔 만큼 이번 우크라니아의 요구에 충격을 받은 것으로 전해졌다.
익명을 요구한 유럽 외교관 4명은 "우크라이나의 절박함은 이해하지만 이렇게 큰 예산 구멍은 예상 못했다"며 자금이 효율적으로 쓰이는지 의문을 제기했다고 뉴욕타임스는 이날 전했다.
계속 커지고 있는 '예산 구멍'
유럽이 이처럼 의구심을 표시하는 것은 결코 무리가 아니다.
뉴욕타임스는 이번달 6일 우크라이나 정부의 비공개 감사 자료를 인용해, 2024년 한 해에만 국방 조달 과정의 사기와 낭비로 12억 달러(약 1조6천억 원)가 새어 나갔다고 보도했다.
특히 계약사 10곳 중 7곳이 사기 협의로 조사를 받거나 계약 불이행 전력이 있음에도 계속 신규 주문을 받아온 것으로 나타났다. 국영 파블로흐라드 화학공장은 사용 불가능한 박격포탄 23만3천 발을 납품하고도 추가 계약을 따낸 사례까지 있었다.
여기에 젤렌스키 대통령의 최측근 사업가 티무르 민디치가 국영 원전공사 조달 과정에서 리베이트를 챙긴 혐의로 수사받는 '오퍼레이션 미다스' 사건도 유럽의 불신을 키웠다. 도청 녹취록에는 그가 당시 국방장관에게 자신이 실소유주로 지목된 드론 제조사 발주를 압박하는 정황까지 담긴 것으로 알려졌다.
반면 우크라이나 측은 전쟁의 더 격렬해지면서 더 많은 돈이 들어간다고 설명한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전임 국방장관 시절 연말 예산이 조기 집행되면서 격차가 벌어졌다고 주장했다. 록솔라나 피들라사 우크라이나 의회 예산위원장은 2026년 1~8월 우크라이나의 군사지출이 2025년과 비교해 17% 이상 늘었다고 밝혔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의 금속공장과 곡물 수출회랑을 집중 공격하면서 올해 8월에만 예상 수입 절반가량이 증발한 점도 재정난을 부채질한 것으로 알려졌다.
글로벌 싱크탱크 저먼마셜펀드의 올레나 프로코펜코 연구원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객관적으로 더 비싸졌다"고 짚었다.
갈라지는 유럽, 해법 찾기 난망
유럽연합 깃발. ⓒ 로이터/연합뉴스
당장 가장 유력한 단기 방안은 유럽연합이 이미 확정된 우크라이나를 향한 1천억 달러(133조 원) 대출을 2026~2027년 분할 지급하는 대신 앞당겨 집행하는 것이다.
유럽연합은 올해 8월 3억2천만 유로(약 5천억 원) 규모의 대출을 추가 지급해 패트리어트 방공 미사일 구매를 지원했고, 지금까지 84억 유로(약 13조 원)가 집행됐다. 다만 조기집행은 2027년 하반기에 우크라이나를 지원할 여력이 줄어드는 부작용을 낳는다.
이 때문에 일각에서 벨기에 위치한 국제증권예탁결제기관 유로클리어에 묶인 2천억 유로(약 311조 원) 이상의 러시아 동결자산을 몰수하는 방안이 다시 수면 위로 올라오고 있다.
유럽의회 의원 123명이 최근 자산 활용 방안을 조속히 재검토하라는 서한을 보냈고, 스웨덴·폴란드·네덜란드·스페인 4개 나라도 재추진을 요구했다. 그러나 벨기에는 요지부동이다.
테오 프란켄 벨기에 국방장관은 벨기에 공영방송 VRT 인터뷰에서 "러시아 동결자산의 몰수 문제는 논의 대상이 아니다"며 "문은 닫혔다"고 밝혔다. 바르트 더베버 벨기에 총리는 러시아의 동결자산을 몰수하면 러시아의 법적 소송을 벨기에가 떠안을 것을 우려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를테면 벨기에가 '독박'을 뒤집어쓰는 셈이다.
안드리 시비하 우크라이나 외교장관은 뉴욕타임스에 "협상은 미래의 일이지만 자금은 지금 당장 필요하다"고 촉구했지만, 벨리에가 물러설 가능성의 거의 없다는 게 대체적 관측이다.
결국 우크라이나의 270억 달러 요청은 전쟁 5년 차의 비용부담과 내부 신뢰문제가 충돌하는 지점을 드러낸다. 유럽이 부패 우려를 접고 지갑을 다시 열지, 조건부 지원으로 선회할지가 귀추가 주목된다.
이 지점에서 유럽의 재정 지원이 언제까지 이어질 것이냐는 근본적 질문이 남는다. 이번 전쟁이 러시아의 패배로 끝난다면 다행이겠으나, 러시아는 이미 우크라이나 동부 공업지역인 돈바스 지역을 거의 점령한 상황이다. 우크라이나 남부 오데사항까지 공격해 점령한다면 우크라이나는 내륙국가로 쪼그라든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전쟁을 멈출 조짐을 보이지 않고 있다. 실제 서방의 제재와 군비 지출을 견디디 못해 스스로 멈추지 않는 한 전쟁은 계속될 것이다. 그럴 수록 유럽연합은 계속 돈을 더 쏟아부어야 한다. 지금 돈줄을 끊으면 우크라이나는 곧바로 '무조건 항복'을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