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자설기(왼쪽), 10일 온라인 커뮤니티에 올라온 SNS 글. ⓒ엑스 계정/온라인 커뮤니티
몇 달 전 폐업 위기의 동네 문구점을 북적이게 했던 말랑이와 왁뿌볼에 이어, 이번에는 피자설기가 젊은 손님들의 발길을 동네 떡집으로 돌리고 있다. ‘억지 유행’, ‘반짝 유행’이라는 차가운 시선도 있지만 “유행이면 어떠냐. 동네 가게가 살아나면 좋은 것 아니냐”는 반가운 반응이 나온다.
지난 9일 한 온라인 커뮤니티에는 “피자설기도 그렇고 두쫀쿠도 그렇고 말랑이도 그렇고 억지유행이라고 하지만 안 그래도 힘든 자영업자들 돈 벌면 좋지 뭐”라는 제목의 글이 올라왔다. 해당 글에는 30년 넘게 떡집을 운영해온 어머니가 피자설기 덕분에 오랜만에 웃음을 되찾았다는 SNS 사연 내용도 함께 올라왔다.
글쓴이는 “유명한 시장이 아니다 보니 젊은 사람이 거의 없어 장사가 힘들다”며 “어머니가 2주 전부터 피자설기를 팔기 시작했는데 젊은 부부와 커플, 아이 엄마들이 정말 많이 오신다”고 전했다.
몰려드는 주문에 가족까지 일손을 보태고 있다. 글쓴이는 “어머니가 허리가 아파 두 판 정도밖에 못 만드셔서 내가 도와드리고 있다”며 “어머니가 웃으시는 걸 정말 오랜만에 봤다”고 했다. 해당 글에는 1만8천 개가 넘는 공감이 달렸다.
사연을 접한 누리꾼들도 “반짝 유행이어도 자영업자들이 잘되면 좋다”, “소상공인과 자영업자가 살아날 수 있는 유행은 환영”이라는 반응을 보였다. 피자설기를 계기로 치즈떡이나 흑임자떡 등 다른 떡까지 함께 주목받았으면 좋겠다는 의견도 나왔다.
말랑이에 문구점 북적이더니, 이번엔 떡집이다
9월10일 인스타그램 '#피자설기'라고 검색하면 나오는 피드의 모습. ⓒ인스타그램
SNS에서 시작된 유행이 골목 가게로 손님을 불러들인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앞서 말랑이와 왁뿌볼이 인기를 끌 당시 서울 종로구 창신동 ‘동대문 문구완구거리’에는 20~30대의 발길이 이어졌다. 학용품과 사무용품이라는 고정 수요 고객에 기대던 동네 문구점에 말랑이와 왁뿌볼 같은 장난감이 새로운 손님을 데려온 것이다.
한 누리꾼은 “말랑이 덕분에 손님이 줄었던 오래된 문방구에 젊은 사람들이 많이 찾아오는 모습이 좋았다”며 “가게 주인 할아버지가 말랑이에 대해 열정적으로 설명해 주시는 모습도 인상적이었다”고 전했다.
이번에는 그 발길이 동네 떡집으로 향하고 있다. 백설기 위에 토마토소스와 치즈, 햄 등을 얹은 피자설기가 숏폼과 SNS를 타고 퍼지면서 전국 동네 떡집의 메뉴로 빠르게 번지고 있다. 그 결과, 명절이나 행사 때 주로 찾는 음식, 중장년층이 즐기는 간식이라는 이미지가 강했던 떡이 젊은 층의 일상 간식이자 디저트로 소비 영역을 넓히고 있다.
유행의 주인공이 대기업 제품이나 특정 프랜차이즈의 독점 메뉴가 아니라는 점도 눈길을 끈다. SNS에서 피자설기를 접한 소비자가 가까운 동네 떡집을 찾아가고, 인증샷과 후기를 올리면 그 게시물이 다시 새로운 손님을 불러들이는 식이다.
9월9일 트위터에 올라온 '전국 피자설기 맛집 54곳' ⓒ트위터 계정
최근에는 온라인에서 전국 피자설기 판매점을 한눈에 볼 수 있도록 정리한 '전국 피자설기 맛집 54곳'까지 공유되면서 이른바 ‘떡지순례’에도 불이 붙었다. 피자설기는 백설기의 담백하고 은은한 단맛에 토마토소스의 새콤함, 치즈의 짭짤하고 고소한 풍미가 어우러진 ‘단짠(달고 짠)’ 조합으로 입맛을 사로잡고 있다.
“누가 원조냐” 싸움 없이, 동네 떡집이 함께 뜬다
피자설기 유행에서 눈에 띄는 또 다른 점은 특정 가게로만 손님이 몰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인기 음식이 등장할 때마다 으레 따라붙는 ‘원조 논란’이나 레시피를 둘러싼 법적 다툼 대신 전국의 동네 떡집이 저마다 피자설기를 만들어 팔며 유행의 특수를 함께 누리고 있다.
특정 업체만 만들 수 있는 독점 메뉴가 아닌 데다 새로운 설비에 큰돈을 들일 필요가 없다는 것도 장점이다. 기존 떡집이 갖춘 설비와 기술을 활용해 비교적 쉽게 메뉴를 내놓을 수 있어 SNS에서 시작된 유행이 한두 가게에 머무르지 않고 빠르게 퍼질 수 있었다.
소비 행태도 다르다. 유명한 ‘원조 맛집’ 한 곳을 찾아가는 대신 우리 동네에도 피자설기를 파는 가까운 떡집이 있나를 먼저 찾는다. 한 가게 앞에 긴 줄을 세우는 유행이 아니라 전국 곳곳의 떡집으로 손님의 발길을 흩어 보내는 유행인 셈이다.
최근 디저트 업계에서도 이처럼 유행을 독점하기보다 전체 시장의 크기를 함께 키우려는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 동네 카페와 빵집의 오픈런과 품절 대란을 일으킨 ‘두쫀쿠’의 경우, 최초 개발자가 업계 성장을 위해 제조법을 공개하고 레시피 특허를 출원하지 않았다고 직접 밝히기도 했다. 한 곳이 레시피를 틀어쥐기보다 여러 가게가 유행에 올라탈 수 있게 되면서 시장 자체가 커지는 효과를 노린 것이다.
피자설기의 인기는 다른 떡으로 관심을 넓힐 기회이기도 하다. 피자설기를 사러 처음 떡집을 찾은 젊은 소비자가 진열대의 치즈떡이나 흑임자떡, 인절미 등에도 자연스럽게 눈길을 돌릴 수 있어서다.
유행은 빠르게 생겨나고 또 빠르게 사라진다. 그 짧은 유행이 평소라면 찾지 않았을 골목 가게로 사람을 움직이고, 한동안 뜸했던 가게에 다시 손님을 불러들인다면 얘기는 달라진다. 무엇보다 그 온기가 한두 유명 가게에만 머물지 않고 동네 곳곳의 작은 가게로 퍼지고 있다. 피자설기와 함께 세상도 조금 더 따듯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