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왕실을 제 발로 떠났던 해리 왕자와 메건 마클이 6년 만에 다시 영국으로 돌아왔다. 왕실 생활의 압박에서 벗어나 자유를 택하고, 자신들만의 브랜드를 만들겠다던 두 사람이다.
그러나 지난 6년 동안 이들 부부가 가장 폭발적 관심을 받은 순간에는 어김없이 왕실의 내밀한 사생활과 가족 갈등에 대한 폭로가 있었다. 왕실을 떠나는 데는 성공했지만 '왕실 없는 해리와 메건'만의 브랜드를 구축하는 일은 생각처럼 쉽지 않았던 셈이다.
영국 해리 왕자(왼쪽)와 메건 마클이 2026년 4월17일(현지시각) 호주 시드니 본다이비치의 한 행사장으로 이동하고 있다. ⓒAP/연합뉴스
28일 로이터통신과 영국 가디언 등의 보도를 종합하면 해리 왕자와 메건 부부는 두 자녀 아치 왕자와 릴리벳 공주와 함께 26일(현지시각) 영국에 도착했다. 미국으로 떠난 지 6년 만의 귀환이다.
두 자녀는 9월부터 영국 학교에 다닐 예정이며, 가족은 미국 캘리포니아주 몬테시토 자택도 유지한다. 왕실 공무에 복귀하거나 왕실 소유 거처에서 생활하는 것도 아니다. '왕실 복귀'라기보다 비공무 왕족 신분을 유지하면서 생활 거점만 영국으로 다시 옮기는 셈이다.
6년 전 화려했던 독립과 비교하면 이번 귀환은 어딘가 초라해 보인다. 이유는 그간 두 사람이 받아든 성적표에 있다.
2020년 1월 해리 부부는 왕실 고위 구성원에서 물러나겠다고 전격 발표하면서 "경제적으로 독립하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선언했다. 이후 미국으로 건너가 넷플릭스와 영상 콘텐츠 제작 계약을, 스포티파이와는 팟캐스트 제작 계약을 맺었다.
당시 두 사람의 가능성은 무궁무진해 보였다. 왕실 직함을 내려놓더라도 '해리와 메건'이라는 이름만으로 세계적 브랜드가 될 수 있다는 기대가 컸다.
실제 큰 성공도 거뒀었다. 다만 흥행의 중심에는 어김없이 왕실이 있었다.
2021년 3월 오프라 윈프리와의 인터뷰에서 부부는 왕실 내부의 인종차별과 가족 갈등, 메건이 겪은 정신적 고통 등을 공개했다. 이듬해 공개된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해리 앤 메건'에서도 왕실과의 갈등과 그 끝에 영국을 떠나게 된 과정을 전면에 내세웠다.
'해리 앤 메건'은 공개 첫 나흘 동안 2340만 뷰를 기록하며 당시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가운데 역대 최고 데뷔 기록을 세웠다. 현재도 넷플릭스에서 역대 다섯 번째로 많이 본 다큐멘터리 시리즈다.
해리 왕자가 2023년 내놓은 회고록 제목도 '스페어(Spare)'였다. 왕위 계승자인 형 윌리엄이 '후계자(heir)'라면 자신은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한 '예비자(spare)'로 여겨져 왔다는 해리 자신의 인식을 그대로 제목에 담은 것이다.
케이트 미들턴 왕세자빈(왼쪽부터), 윌리엄 왕세자, 해리 왕자, 메건 마클이 2022년 9월10일(현지시각) 영국 윈저성 롱워크에서 시민들을 만나기 위해 함께 이동하고 있다. ⓒAFP/연합뉴스
책에서 해리는 윌리엄 왕세자가 자신을 밀쳐 등이 개밥그릇 위로 떨어졌다고 주장하는 형제간 몸싸움 사건까지 공개했다. 왕실 가족의 치부를 적나라하게 드러낸 것이다. 책은 출간 첫날 미국·영국·캐나다에서 143만 부가 팔릴 만큼 흥행에 성공했다.
왕실을 떠났음에도 이들 부부를 가장 주목받게 한 콘텐츠는 어김없이 '왕실 이야기'였던 셈이다.
반면 왕실과 거리를 둔 콘텐츠의 성적표는 엇갈렸다. 메건이 진행한 여성에 대한 고정관념을 다룬 팟캐스트 '아키타입스'는 2022년 12편의 한 시즌만 제작됐고, 이듬해 스포티파이와의 계약도 종료됐다. 넷플릭스와의 관계도 2020년 맺었던 5년 독점 계약에서 퍼스트룩 계약(새 작품이나 기획이 나오면 해당 기업에 먼저 제안하는 계약)으로 축소됐다.
외신의 평가도 크게 다르지 않다. 영국 가디언은 22일 '해리와 메건의 아메리칸 드림은 끝났나'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해리 앤 메건'의 성공 이후 내놓은 후속 콘텐츠들이 좀처럼 흥행을 이어가지 못했다고 짚었다. 로이터통신도 26일 이들의 막대한 화제성에도 불구, 넷플릭스·스포티파이 등 미디어 사업에서는 잇따라 난관을 겪고 있다고 전했다.
해리에게 물려진 서사는 왕실뿐만이 아니다. 세계는 1997년 어머니 다이애나 전 왕세자빈의 관 뒤를 걷던 12살 소년을 기억한다. 어린 나이에 어머니를 잃은 슬픔에는 오랫동안 대중의 연민도 따랐다.
왕실을 떠날 당시에도 이러한 해리의 과거는 그의 선택을 이해하게 만드는 배경 가운데 하나였다. 그러나 6년이 흐른 지금 그 연민이 계속되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7월 유고브 조사에서 해리에 대한 영국인의 긍정 평가는 33%, 부정 평가는 58%였고 메건 역시 긍정 22%, 부정 65%에 그쳤다.
왕실 전체가 외면받고 있는 것도 아니다. 같은 조사에서 윌리엄 왕세자와 케이트 왕세자빈의 긍정 평가는 각각 76%, 74%였고 찰스 3세도 62%를 기록했다. 왕실과 군주제에 대한 긍정 평가 역시 60% 안팎이었다.
왕실이라는 압도적 배경에 '다이애나의 아들'이라는 서사까지, 해리는 태어날 때부터 남들이 가질 수 없는 막대한 부와 명예를 물려받았다. 문제는 왕실의 후광을 걷어낸 뒤 '해리와 메건' 자체만으로 독립적 경쟁력을 유지하기 어려웠다는 것이다.
지난 6년 동안 왕실과 거리를 두고 독자적 행보를 보여주겠다던 포부와 달리, 두 사람의 가장 큰 흥행 뒤에는 번번이 왕실 내부 소식에 대한 폭로가 있었다. 그토록 원하던 자유를 얻은 뒤의 행보가 오히려 자신들이 벗어나려 했던 왕실의 후광이 얼마나 거대했는지를 역설적으로 보여준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