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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척이나 더웠던 올 여름은 끝나지 않을 것만 같았다. 입추에 이르러 잠시 더위가 꺾이나 싶었지만 여전히 무더웠고, 해가 저물어도 열기는 식지 않아 이대로 가을은 오지 않으려나 생각했다.

그런데 어느 날 아침, 문득 공기가 달라졌다고 느꼈다. 창을 여니 거짓말처럼 서늘한 바람이 들어왔다. 그렇게 계절이 바뀌는 것을 느낀 순간 한 사람이 떠올랐다. 정나래(가명) 씨다.

[변호사 왕미양의 괜찮아요, 그게 인생이에요] 무더위 언젠가 끝나 듯 새로운 기회 반드시 온다
긴 소송과 빚으로 붓을 놓았던 정나래(가명) 씨는 다시 그림을 시작하며 잃어버린 자기 삶을 되찾았다. AI 생성 이미지.

파산관재인으로 맡은 일을 마무리한 뒤에도 잊을만하면 한 번씩 안부를 전해오는 분들이 있다. 정나래 씨도 그중 한 명이다. 전 남편과 재혼했을 때만 해도 그는 안정된 삶을 꿈꿨다.

하지만 남편과 전처 사이에 낳은 자녀 문제, 끊이지 않는 금전 갈등, 여기에 폭언까지 더해지면서 기대는 빠르게 무너졌다. 결혼 몇 달 만에 별거에 들어갔고, 이어진 이혼 소송은 무려 4년을 끌었다. 그 사이 수술까지 받으며 수억 원의 빚을 떠안게 되었다. 

"송사 3년에 집안 망한다는 옛말이 정말 맞더라고요."

이 말이 그의 삶에서 현실이 되어 있었다. 소송에 매달리느라 일상은 무너졌고, 법정을 오가며 시달리는 동안 화가였던 그에게 생명과도 같았던 붓은 들 수 없었다.

면책 허가가 난 뒤 한동안 그의 소식을 들을 수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메시지 하나가 도착했다. 

"이번에 국제아트페어에 특별 초대 작가로 초청을 받았어요. 정말 오랜만의 일이라 너무 기뻐요. 변호사님, 늘 잊지 않겠습니다."

그는 긴 시간 잡지 못했던 붓을 다시 잡은 것이다. 그림을 다시 그린다는 것은 그가 잃었던 자기 자신을 되찾았다는 뜻이기도 했다. 붓을 놓은 화가에게 그 시간은 얼마나 길고 캄캄했을지 다 헤아릴 수 없었다. 나는 길지 않은 그 메시지를 몇 번이나 다시 읽었다.

비슷한 연락은 또 있었다. 조민수(가명) 씨를 처음 만난 건 그가 일흔을 넘겼을 무렵이다. 낡은 옷차림에도 자세는 곧았고 눈빛은 맑았다. 한때 급식 업체와 식당을 운영하며 남부럽지 않게 살았고, 1남 3녀를 모두 대학까지 보낸 성실한 가장이었다.

그런 그가 아들의 사업에 보태기 위해 평생 모은 재산을 내주었다가 모든 것을 잃고 말았다. 아들의 동업자가 돈을 챙겨 달아났고, 아들마저 연락이 끊기자 그는 컨테이너로 지은 집에서 살게 되었다. 그런데도 그는 사라진 아들을 원망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아들이 어디서 어떻게 지내는지 걱정할 뿐이었다. 

면책을 받은 뒤 그가 전화를 걸어왔다. 

"이제 남은 아이들과 평안하게 지내려고 합니다."

[변호사 왕미양의 괜찮아요, 그게 인생이에요] 무더위 언젠가 끝나 듯 새로운 기회 반드시 온다
모든 것을 잃은 뒤에도 조민수(가명) 씨는 원망 대신 평안을 택하며 삶의 다음 길로 걸어갔다. AI 생성 이미지.

그의 목소리에는 원망 대신 평온함이 있었다. 그는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을 내게 소개해 주기까지 했다. 자신이 받은 도움을 다른 이에게도 건네고 싶다는 마음이었다.

두 사람 모두 무너진 자리에서 다시 서기까지 오래 걸렸고, 재기는 결코 순탄하지 않았다. 다만 그들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무너진 그 자리를 새로운 출발선으로 바꾸어냈다.

이 연재를 시작하며 쓴 첫 글에서 나는 파산 법정에서 가장 많이 들었던 첫마디가 "죄송합니다."였다고 적었다. 빚을 졌다는 이유만으로 죄인이라도 된 듯 마주 앉자마자 고개부터 숙였던 사람들. 나는 그런 그들을 볼 때마다 같은 말을 건넸다.

'죄송할 일이 아니라고,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 될 것'이라고 말이다. 그리고 마음 속으로는 시간이 지나 이들이 어려움을 극복해 낼 모습을 그려보며 괜찮다고, 그게 인생이라고 생각했다. 정나래 씨의 메시지를 받던 순간, 조민수 씨의 평온한 목소리를 듣던 순간 내가 그들에게 건넸던 말이 현실로 이루어졌음을 확인했다. 

살다 보면 때로는 쓰러지고 무너지기도 한다. 그 순간을 딛고 얼마든지 다시 시작할 수 있다. 법조문 한 줄보다 사람이 먼저 보여야 한다는 것, 그리고 아무리 길고 어두운 터널도 결국 끝이 있다는 것은 법을 다루며 수많은 사람을 만나온 26년이라는 시간이 내게 가르쳐준 가장 확실한 진리다.

뜨거운 볕 아래에서 묵묵히 오늘을 살아낸 우리에게 선물 같은 바람이 불어오는 지금, 이 진리를 다시 되새겨본다.

글쓴이 왕미양은 변호사로 현재 한국여성리더연합 공동대표로 활동하고 있으며, 2026년 1월에 제13대 한국여성변호사회 회장직을 마쳤다. 여성 변호사가 100명 남짓이던 2000년에 법조계에 첫발을 들인 이래, 성남여성의전화 무료 상담을 시작으로 아동·여성·사회적 약자의 인권 보호 활동에 매진해 왔다. 2010년부터는 13년 동안 파산관재인으로 2400여 명의 채무자를 만나며 "법은 결국 사람을 위한 것"이라는 신념을 굳혔다. 2026년, 여성의 리더십을 발휘하고 폭력 피해자 및 사회적 약자를 위한 법률 지원 공로로 '올해의 서울여성상'을 수상했다. 칼럼을 통해 법조문이 아니라 그 안에 있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려주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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