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희대 대법원장이 7개월 가까이 미뤄온 대법관 후보자 제청을 전격 단행하면서 여권과 사법부의 갈등이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김민석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20일 이해찬 전 총리가 안장된 세종시 은하수공원으로 들어서고 있다. ⓒ연합뉴스
여권의 압박을 받아오던 조 대법원장이 민주당 전당대회가 끝난 다음 날, 대통령실과 대면 협의를 거치지 않은 채 두 명의 대법관 후보를 동시에 서면 제청한 것을 두고 정치적 상황까지 치밀하게 고려해 정면 반격에 나선 게 아니냐는 해석이 나온다.
더불어민주당은 조 대법원장의 행태에 매우 격앙된 반응을 보이고 있지만 이재명 대통령 지지율이 낮은 상황에서 대법원장 탄핵을 추진하기에는 정치적 부담이 커 고민이 깊어질 것으로 보인다.
20일 민주당과 국민의힘은 조희대 대법원장의 대법관 제청 문제를 두고 공방을 이어갔다.
민주당은 조 대법원장의 '청와대 패싱' 대법관 제청에 격앙된 반응을 보이면서도 탄핵 추진은 주저하는 모습을 보였다. 탄핵 사유인 헌법이나 법률 위반을 증명하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으로 보인다.
헌법 제104조 2항은 대법관을 대법원장의 제청으로 국회의 동의를 얻어 대통령이 임명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헌법에 대통령과 대법원장이 사전에 만나 후보자를 조율해야 한다는 명시적인 규정이 없다. 이 때문에 법조계에서도 대통령과 대법원장의 대법관 제청 사전 협의는 헌법상 의무라기보다는 그동안 이어져온 관행에 가깝다는 견해가 많다.
김준일 시사평론가는 20일 CBS라디오 뉴스쇼에서 "조 대법원장이 관행을 무시한 것에 대해서는 비판을 받을 부분이 있지만 탄핵은 말도 안 된다"며 "관행을 안 지켰다고 대법원장을 탄핵한다? 헌법재판소에서 100% 기각될 것"이라고 말했다.
임재성 변호사도 19일 MBC라디오 시선집중에서 "조 대법원장의 행태에 대해 법조인들 대부분 비판적 입장을 공유할 거라는 생각이 들지만 민주당에서 탄핵은 못할 것"이라며 "헌법재판소에서 탄핵이 기각되면 조 대법원장에게 훨씬 더 큰 훈장을 안겨주는 셈이라 민주당과 청와대가 매우 곤혹스러울 것"이라고 말했다.
심지어 대법원은 대법관 제청 사전논의가 이뤄지지 못한 책임을 청와대로 돌렸다. 노경필 법원행정처장은 19일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전체회의에 출석해 "청와대에 만남을 요구했지만 만나지 못했다"고 말했다. 여기에 국민의힘과 개혁신당 등 보수 야권에서 민주당의 조 대법원장 사퇴 요구를 '사법부 장악'이라며 공세를 펴고 있는 점도 정치적 부담으로 작용하고 있다.
장동혁 국민의힘 대표는 이날 최고위원회의에서 "대법원장에게 대법관 제청권을 준 이유는 사법권 독립을 위한 것인데 대통령실과 미리 협의해 대통령 입맛에 맞는 사람으로 미리 조율하고 제청하라고 하면 그게 제청인가"라며 "(김민석 대표가) 첫날부터 대법원장에게 공갈 협박이나 늘어놓는 모습은 정청래와 뭐가 다른가"라고 말했다.
이재명 대통령이 20일 청와대에서 열린 수석보좌관회의 참석해 회의 시작을 기다리고 있다. ⓒ연합뉴스
청와대 역시 이번 조 대법원장의 대법관 제청을 두고 딜레마에 빠졌다. 제청을 모두 거부하면 민주당과 국민의힘은 '사법부 독립'이라는 정쟁에 빠지게 된다. 반대로 후보를 제청하면 조 대법원장의 뜻이 관철되는 모양새가 된다.
그렇다고 제청을 계속 미루기도 어럽다. 이렇게 되면 대법관 공백 상황이 더욱 길어지면서 재판 진행이 연기되는 등 국민적 피해에 대한 책임이 청와대로 향할 공산이 크다. 대법원은 이미 대법관 한 명의 공백으로 상고심 재판 차질이 현실화하고 있다는 지적을 받아왔고 지난 7월에는 대법관 공백이 넉 달을 넘기면서 주요 사건의 상고심 심리가 지연되는 문제가 현실화하고 있다는 보도까지 나왔다.
청와대가 직접적으로 사법부와 강하게 부딪히기 어려운 상황에서 김민석 민주당 대표에게 공이 넘어갔다는 분석이 나온다. 탄핵을 추진할지 여부가 결국 김 대표에게 달렸다는 것이다.
친청(친정청래)계인 최민희 최고위원은 전날 최고위원회의에서 탄핵을 포함한 조 대법원장 거취에 대한 국회 논의를 촉구한 것으로 전해졌다. 그러나 김민석 대표는 조 대법원장의 사퇴를 강하게 요구하면서도 탄핵 추진에 대한 언급은 하지 않았다.
김 대표는 이날 세종 은하수공원에서 이해찬 전 국무총리 묘역을 참배한 뒤에도 '법치 파괴 조희대는 물러나야 합니다'라는 문구가 담긴 현수막을 걸도록 지시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결국 탄핵 추진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김성회 민주당 원내대변인은 이날 국회에서 열린 원내대책회의가 끝난 뒤 취재진을 만나 "어제 김민석 대표가 사퇴를 요구한다고 한 게 당의 입장으로 이해하면 된다"며 "탄핵은 논의된 바 없다"고 말했다.
사실상 조희대 대법원장 탄핵 추진에는 선을 그은 것으로 해석된다. 원내지도부가 공식적으로 탄핵 추진과 거리를 두면서 당장 탄핵 절차에 착수할 가능성은 낮아졌다.
이재명 대통령의 지지율이 연일 최저치를 경신하고 있는 만큼 민주당이 조 대법원장 탄핵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기는 쉽지 않은 상황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민주당이 대법원장 탄핵이라는 초강수를 꺼내 들 경우 지지층 결집에는 도움이 될 수도 있지만 중도층에는 ‘정권이 사법부를 압박한다’는 인상을 줄 위험성이 크기 때문이다.
박범계 민주당 의원은 이날 유튜브 방송 '겸손은 힘들다 뉴스공장'에서 "정서적으로는 탄핵감이지만 김민석 대표의 표현을 넘어설 수는 없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