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위는 이 같은 성별 불균형의 배경에 일부 지역의 ‘세대주’ 중심 의사결정 구조가 있다고 봤다. 겉으로는 성별과 무관한 기준이지만, 오랫동안 남성이 가구 대표 역할을 맡아온 사회문화적 관행과 맞물릴 경우 여성의 투표권과 의사결정 참여를 제한하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인권위는 이를 여성에 대한 ‘간접차별’로 볼 수 있다고 판단했다.
논에 서 있는 한 여성. AI 이미지
국가인권위원회는 이장 선출·임명 과정에서 성차별적 관행이 있는지 살펴보기 위해 직권조사를 실시했으며, 그 결과를 19일 공개했다.
인권위는 앞서 2023년 전북의 한 마을에서 제기된 진정을 조사하면서 문제를 확인했다. 해당 마을에서는 무려 60년 동안 여성 이장이 선출된 사례가 없었고, 여성 주민이 이장 후보로 추천된 전례도 없었다. 이장 추천권을 가진 마을개발위원회에도 여성 위원이 포함돼 있지 않았다.
인권위는 이를 계기로 기초자치단체 단위에서 이장 선출 과정의 성별 불균형이 어떻게 나타나는지 직권조사를 벌였다. 강원특별자치도 등 9개 광역자치단체 소속 기초자치단체를 대상으로 이장 선출 관련 조례와 규칙, 주민등록 및 세대주 현황, 10년간 이장 임명 현황, 마을회 정관 등을 살폈다. 조사 과정에서 107개 기초자치단체, 1093개 읍·면, 2만8517개 행정리의 자료가 분석됐다.
그 결과, 2014년부터 2023년까지 2만8517개 행정리에서 이장 선출·임명은 모두 10만7945회 이뤄졌다. 이 가운데 남성은 9만7812회로 전체의 90.61%를 차지했다. 여성은 9104회, 8.43%에 불과했다.
일부 지역에서는 여성 이장 비율이 10%에도 미치지 못했다. 지역별로는 경상남도가 11.58%로 가장 높았고, 제주특별자치도는 2.54%로 가장 낮았다.
그렇다고 지자체가 대놓고 ‘남성만 이장으로 뽑을 수 있다’고 규정한 것은 아니다. 인권위 조사에서 조례나 규칙에 특정 성별을 제한하는 직접적인 차별 규정은 확인되지 않았다.
문제는 ‘세대주’라는 기준이었다. 일부 지자체 규칙과 마을 정관에서는 주민총회 참석권이나 의결권, 이장 후보 추천권 등을 세대주 또는 세대주가 위임한 1명, 세대별 1명에게만 부여하고 있었다. 형식만 보면 성별과 무관한 기준이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이야기가 달라진다.
농어촌 지역에서는 오랫동안 남성이 가구의 대표이자 세대주 역할을 맡아온 경우가 많았다. 이런 사회문화적 관행과 ‘세대주 1인’이라는 규정이 맞물리면 여성은 주민총회에서 투표하거나 이장 선출에 의견을 내는 것부터 어려워질 수 있다.
여기에 마을개발위원회 같은 공식 기구뿐 아니라 오랫동안 이어져 온 남성 중심의 비공식 네트워크까지 더해지면 여성에게는 이장 후보가 되는 과정 자체가 높은 장벽이 될 수 있다. 인권위가 이를 ‘간접차별’의 가능성이 있다고 본 이유다.
인권위는 다만 여성 이장이 적은 원인을 조례나 마을 정관 하나 때문이라고 단정하지는 않았다. 가사와 돌봄 부담의 성별 불균형, 남성 중심의 인적 네트워크, 여성의 리더십 경험과 경로 부족 등 여러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라는 것이다.
이장은 주민 생활과 밀접한 지역 현안을 논의하고 행정과 주민을 연결하는 기초적인 대표자다. 인권위는 기초 행정단위의 성별 불균형을 해소하는 것은 특정 성별만을 위한 정책이 아닌, 지역 의제를 다양화하고 확장하는 것이며, 민주적 대표성을 실질적으로 강화할 수 있다고 봤다.
이에 인권위는 지난 4일 제도 개선을 촉구하는 의견을 표명했다. 인권위는 읍·면을 두고 있는 기초자치단체장에게 이장 선출·임명 과정에서 특정 성별이 불리하지 않도록 관련 조례와 규칙을 점검하고, 특히 여성 주민의 참여를 제한할 수 있는 주민총회 의결 자격 규정을 폐지하는 등 제도를 정비할 것을 권고했다.
또 마을회 정관에 성별에 따라 불리한 내용이 없는지 점검하고, 마을개발위원회 등 각종 위원회가 특정 성별에 지나치게 편중되지 않도록 개선할 필요가 있다고 봤다.
행정안전부에는 이장 선출·임명 관련 조례와 규칙을 점검하고 성별 현황을 정기적으로 살필 것을 권고했다. 행정안전부·농림축산식품부·성평등가족부에는 농어촌지역 의사결정 구조의 성별 불균형을 줄이기 위해 성평등한 마을회 정관 표준안을 개발·보급할 필요가 있다고 권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