앤디 버넘 신임 영국 총리가 취임 첫 주에 대중교통 및 전기 요금을 인하하여, 버스이용·전기차·히트펌프 등 이산화탄소 저배출 기술을 유권자들이 더 부담 없이 이용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이를 뒷받침할 재원의 상당 부분을 개발도상국에 무상으로 지원하기로 약속했던 국제 열대우림기금에서 빼온 것으로 확인되며 논란이 일고 있다. 기후변화에 대응할 ‘선진국의로서 책임’을 뒤로 한 채 자국민을 먼저 챙겼기 때문이다.
앤디 버넘 영국 총리. ⓒ 로이터=연합뉴스
27일 기후전문매체 클라이맷홈뉴스를 비롯한 외신보도를 종합하면 버넘 총리가 개발도상국에 지원할 기후보호 무상지원금을 대출형식으로 바꾸기로 하면서 영국뿐만 아니라 국제사회에서 비판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영국, 개도국에 약속한 '무상 지원'을 '대출 지원'으로 바꿔
버넘 총리는 취임하자마자 물가에 지친 영국 국민들을 달래고, 대중교통 이용 장려를 통해 환경을 개선한다는 명분을 담은 해당 정책을 발표했다.
가정용 전기요금 부가가치세를 5%에서 0%로, 버스요금 상한을 3파운드(약 5900원)에서 2파운드(약 4000원)로 각각 낮추겠다고 밝혔다. 이는 물가상승 부담을 줄이고, 전기차와 히트펌프, 버스이용 등을 장려해 영국의 온실가스 배출을 줄이기 위해 추진됐다.
문제는 버스요금을 깎아주는데 필요한 돈 약 4억5400만 파운드(약 8천억 원) 가운데 4억 파운드(약 7천억 원)을 기후환경 관련 국제기금에 지원하기로 한 돈에서 끌어오기로 했다는 점이다.
영국은 원래 브라질이 주도하는 '열대우림영구기금(TFFF)'이라는 국제기금에 4천억 파운드를 조건 없이 지원하기로 약속한 바 있다.
이 기금은 아마존과 같은 열대우림을 가진 가난한 나라들이 나무를 베지 않고 숲을 지키는 대가로 돈을 지원하도록 한 것이다.
그런데 버넘 총리는 이 지원금을 '무상 지원'에서 '대출 지원'로 바꿔버렸다. 무상으로 지원하는 돈을 빌려주는 돈으로 바꾸고, 그렇게 남긴 재원을 자기 나라 버스비 인하에 쓰기로 한 것이다.
이 소식이 알려지자 곧바로 비판이 쏟아졌다.
영국 국제개발 NGO 연합체 '본드(Bond)'의 로밀리 그린힐 대표는 최근 발표한 성명에서 "버넘 총리의 새로운 정책에 매우 실망했다"며 "이는 아랫돌 빼서 윗돌 괴는 미봉책에 불과하다"고 꼬집었다.
그린힐 대표는 "기후재정은 자신들이 일으키지도 않은 위기로 이미 가장 큰 피해를 보고 있는 가난한 나라들을 지원하는 것"이라며 "그런 가난한 나라들에게 빚 부담을 더 지워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앤디 버넘 영국 총리가 2026년 7월20일 런던 다우닝가 10번지에서 기자들과 만나 발언하고 있다. ⓒ AP통신=연합뉴스
영국, '외국 기후재앙' 보다 '자국 민생'이 급하다
사실 영국이 개발도상국 기후·개발 지원 약속을 뒤집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영국은 올해 2월 기후위기로 고통 받는 개발도상국에 대한 기후재원 지원액을 20% 이상 삭감하겠다는 계획을 내놓아 논란에 휘말린 바 있다. 이는 2024년 말 세계기후총회에서 선진국들이 기후재정을 증액해 지원하겠다고 약속한 지 1년 남짓 만에 나온 삭감 계획이었다.
영국 가디언은 올해 2월5일 영국 재무부가 개발도상국에 대한 기후재정 지원액을 지난 5년간 116억 파운드(한화 약 23조1천억 원)에서 앞으로 5년간 90억 파운드(약 17조9천억 원)으로 삭감할 계획을 갖고 있다고 전했다.
인도 기후정책 연구기관인 '사타트 삼파다'의 공동설립자인 하르짓 싱은 이를 두고 가디언에 "영국은 재정적 약속을 저버리면서 기후리더라고 주장할 수 없다"며 "이런 조치는 국제무대에서 영국의 위상을 무너뜨릴 수 있다"고 말했다.
비영리 기후에너지 연구기관인 '파워 시프트 아프리카(PSA)'의 모하메드 아도우 소장도 “기후위기에 취약한 국가들에 영국의 기후재원 지원은 회복력과 재앙을 가르는 중요한 요소이고, 지원을 삭감하는 것은 인명과 생계를 위협할 것이다”며 “영국이 약속을 어긴다면 다른 나라들도 똑같이 행동할 수 있는 빌미를 제공하게 되고 이는 전 세계적 기후행동에 파괴적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에 앞서 영국은 2022년 11월 제27차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COP27)가 이집트에서 열리기 직전에도 비슷한 일을 벌인 사례가 있다.
영국은 당시 녹색기후기금에 약속했던 2억8800만 달러(약 4220억 원)와 적응기금 2060만 달러(약 300억 원)를 기한 내 납부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를 두고 당시 전문가들은 기후관련 정상회의를 앞두고 국제사회에 강력한 불신을 심어줬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국제환경개발연구소(IIED)의 클레어 샤캬 기후변화 담당이사는 영국의 지원금 불이행을 두고 "영국의 행동은 시기상 매우 나쁠 뿐만 아니라 지원 당사자가 스스로 약속을 어기는 모습으로 신뢰를 깨뜨리는 것이다"며 "이는 부유한 국가를 믿지 말라는 강력한 부정적 신호를 개발도상국에 전달하는 꼴이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