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세의 예술가는 헬멧을 착용하고 직접 15톤짜리 셔먼 탱크 조종석에 올라탔다. 탱크는 직진해 전기 자동차 테슬라를 그대로 짓눌렀다. 차에 붙은 번호판에는 단 하나의 단어가 새겨져 있었다. ‘파시즘(FASCISM)’.
예술단체 레드 바이 돈키스가 2025년 5월7일 탱크를 몰아 파시즘이라는 번호판을 단 테슬라 차량을 짓밟는 행위예술을 펼쳐보이고 있다. 이는 영상에 담겨 이튿날 유튜브 채널를 통해 공개됐다. ⓒ레드 바이 돈키스 유튜브 계정
영국의 급진 현대미술가이자 제2차 세계대전 참전 용사인 켄 터너가 23일(현지시각) 영국 현지에서 100세 기념 회고전을 열었다. 그의 70여 년 예술 인생을 조명하는 이번 전시에서 탱크로 테슬라를 짓밟은 퍼포먼스(행위예술)이 다시금 새롭게 주목을 받고 있다.
이 퍼포먼스는 제2차 세계대전 유럽 전승 기념일(VE Day)을 하루 앞둔 2025년 5월7일 비밀리에 진행된 뒤 이튿날 영상으로 공개됐다. 영국의 저항 예술 단체 ‘레드 바이 돈키스’와 함께 준비한 프로젝트였다.
예술단체 레드 바이 돈키스는 2025년 5월8일 유튜브 채널에 통해 탱크가 테슬라를 짓밟는 퍼포먼스 영상을 공개했다. 전날 촬영된 영상 속 98세의 켄 터너는 직접 15톤 셔먼 탱크 조종석에 올라탔고, 탱크의 운전대를 잡았다. ⓒ레드 바이 돈키스 유튜브 계정
터너가 올라탄 탱크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연합군이 나치와 싸울 때 사용했던 15톤 셔먼 탱크였다. 1926년생인 켄 터너는 실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와 싸운 참전용사다. 그는 전쟁의 기억을 품은 탱크의 조종석에 직접 올라 테슬라 모델3를 짓밟았다.
제2차 세계대전 참전 용사, “파시즘을 다시 짓밟을 것”
그렇다면 터너는 왜 ‘파시즘’이라는 이름을 붙인 테슬라를 탱크 아래에 놓았을까. 여기서 파시즘은 쉽게 말하자면, 민주주의를 억압하고 강력한 독재 권력을 추구하는 사상을 뜻한다.
탱크가 테슬라를 향해 돌진하기 전, 차량에는 ‘파시즘(Fascism)’이라는 단 하나의 문구가 새겨진 번호판이 붙어 있었다. ⓒ레드 바이 돈키스 유튜브 계정
프로젝트를 함께한 예술단체 레드 바이 돈키스는 2025년 5월8일 영상을 공개하며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인 일론 머스크는 자신의 막대한 영향력을 이용해 유럽의 극우 세력을 지지하고 있다. 그리고 그 돈은 테슬라 자동차에서 나온다”고 주장했다.
이어 테슬라 최고경영자(CEO) 일론 머스크를 향해 “우리는 과거에도 파시즘을 짓밟았다. 그리고 다시 한번 짓밟을 것이다”고 덧붙였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파시즘과 싸웠던 세대가 오늘날 다시 고개를 드는 극단주의에도 맞서 싸우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이 작품이 큰 주목을 받은 것도 시대적 맥락 때문이다. 머스크는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소셜미디어 플랫폼 엑스(X, 옛 트위터) 계정을 통해 유럽 극우 세력과 우파 정치 운동을 공개적으로 지지하는 발언을 이어가며 정치적 논란의 중심에 서 있다. 그에게 테슬라는 거대한 부와 영향력을 가진 기업가가 정치와 사회에 목소리를 내는 시대를 압축한 상징이자, 기업 권력이 가진 힘을 드러내는 하나의 표상이었다.
일론 머스크가 2025년 2월20일(현지시각) 미국 메릴랜드주 내셔널하버에서 열린 보수정치행동회의(CPAC) 무대에서 전기톱을 들어 올리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당시 영상이 공개되자, 온라인에서는 뜨거운 반응이 이어졌다. 누리꾼들은 “98세의 나이에도 여전히 파시즘에 맞서 싸우고 있다”, “저는 독일인이고 할머니는 94세이신데, 파시즘의 부상을 목격하셨고 지금도 역사가 되풀이되고 있다고 늘 말씀하신다”, “켄은 98세에도 트럼프(78세)보다 훨씬 더 총명해 보이고, 정책도 훨씬 더 훌륭하다” 등의 댓글이 동영상에는 달렸다.
‘예술은 침묵해서는 안 된다’, 전쟁과 극단주의를 겨눈 100세 예술가의 행동
그는 1960년대 영국 미술계의 권위주의에 맞서 급진적 공공예술 집단 ‘액션 스페이스’를 이끈 급진(라디컬) 미술의 거장이기도 하다. 미술관 벽 안에 갇힌 예술을 거부한 그는 거리로 나왔다. 사회의 불평등과 권력에 맞서는 행동주의 예술을 펼치며, 예술을 감상의 대상이 아니라 현실을 흔드는 언어로 바꿨다.
그는 예술은 침묵해서는 안 되며, 부조리에 맞서는 무기가 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100세가 된 지금도 그림과 퍼포먼스를 통해 전쟁의 폭력과 극단주의를 정면으로 겨냥해 왔다. 터너는 최근에도 ‘Memorial to the Fallen in Gaza(가자에서 쓰러진 이들을 위한 추모)’ 같은 작품을 통해 가자 전쟁 등 세계 곳곳의 전쟁과 폭력의 희생자들을 화폭에 담아왔다.
켄 터너의 100세 기념 회고전은 23일부터 8월 4일까지 영국 콘월주 펜잔스 워프사이드 아트 허브(Wharfside Arts Hub)에서 열린다. 전시는 화요일부터 일요일까지 오전 11시부터 오후 7시까지 무료로 관람할 수 있다. 회화와 드로잉, 퍼포먼스 기록 영상 등 그의 70여 년 예술 세계를 조명하는 작품들이 소개된다.
특히 탱크로 테슬라를 밟은 뒤 그린 대형 회화 작품 ‘My Ride Over a Tesla Car(테슬라를 넘어선 나의 질주)’도 전시된다. 전시 기간에는 작업실을 일반에 공개하는 오픈 스튜디오 프로그램도 함께 운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