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AI)은 완벽한 것이 오히려 약점인 것 같다. 불리해도 승부수를 던지지 않는다. 인간 바둑은 상황에 따라 승부수와 묘수를 던지는 게 매력이다.”
신진서 9단이 바둑 AI 카타고를 상대로 승리를 거둔 뒤 남긴 이 감상은 바둑을 넘어 우리 산업에도 적용되는 말이다.
바둑 AI 카타고는 가장 높은 승률을 계산한다. 가장 합리적 수를 찾고 불필요한 위험을 피한다. 그것이 인공지능의 강점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전투적 기풍을 지닌 신진서 9단이 인내하며 던진 철저한 ‘집바둑’ 승부수에 무릎을 꿀었다. 신진서 9단도 “내 스타일을 버리고 수비 지향적으로 오직 이기기 위한 바둑을 두는 게 굉장히 힘든 과정이었다”고 소회를 밝히기도 했다.
2026년 신진서 9단, 2016년 이세돌 9단이 보여준 것처럼 승률과 숫자 계산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승부수'가 산업계에도 존재한다. 사진은 신진서 9단이 2026년 7월19일 서울 중구 한국경제TV스튜디오에서 열린 바둑 인공지능(AI) 카타고와 2국을 치르고 있는 모습. ⓒ연합뉴스
산업의 역사도 이번 승부처럼 안전한 선택으로 자리를 지킨 승리의 기록만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승부수를 던져 판을 뒤집은 순간들이 새로운 시대를 만들었다고 볼 수 있다. 혁신은 원래 승률이 높은 게임이 아니기 때문이다.
시간이 흐른 뒤 돌아보면 모두 당연한 선택처럼 보인다. 다만 그 순간으로 돌아가 보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시장은 존재하지 않았고 수요는 검증되지 않았으며 성공 가능성도 희미했다. 당시의 데이터만 놓고 보면 투자하지 않는 편이 오히려 더 합리적 결정이었다.
엔비디아가 그랬다. AI 열풍이 불기 훨씬 전부터 AI 프로그래밍 플랫폼 ‘쿠다(CUDA)’ 생태계를 구축하는 데 막대한 자금을 투입했다. 당장의 수익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투자였다. 그러나 그 승부수는 AI 시대 엔비디아를 대체 불가능한 기업으로 만들었다. 당시 AI에 자문을 구했다면 “잘 팔리는 그래픽처리장치(GPU)나 더 만들어라”는 답이 돌아왔을지도 모른다.
SK하이닉스도 마찬가지다. 고대역폭메모리(HBM)는 한동안 틈새시장에 가까웠다. 범용 D램 경쟁에 집중하는 편이 더 안전하다는 시각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SK하이닉스는 HBM에 역량을 집중했고 지금은 AI 메모리 시장을 이끌고 있다.
2012년 SK그룹의 하이닉스 인수 역시 당시에는 무모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업황은 나빴고 대규모 차입에 대한 우려도 컸다. 그러나 15년 가까이 지난 지금 그 결정은 SK그룹의 운명을 바꾼 승부수로 평가된다. 당시의 승률은 높지 않았지만 결과는 달랐다. 엔비디아와 SK하이닉스는 승률보다 승부수를 택했고 그 선택은 결국 산업의 질서를 주도했다.
이쯤에서 또 떠오르는 기업은 삼성전자다.
과거 삼성전자는 누구보다 과감했다. 메모리 반도체에 천문학적 투자를 단행했고 디스플레이와 스마트폰에서도 경쟁사들이 따라오기 어려울 정도의 선제적 투자를 이어갔다. 그 승부수들이 오늘의 삼성을 만들었다.
그러나 최근 몇 년은 분위기가 달랐다. 삼성전자가 ‘숫자’에 집중해 모험보다는 안정을 택한다는 시각이 많았고 AI 반도체 시대가 열리는 동안 HBM에서는 SK하이닉스에 주도권을 내줘야 했다. 위험을 피하기 위해 가져간 선택이 결국 ‘삼성전자 위기설’이라는 더 큰 불확실성으로 되돌아온 셈이다.
물론 삼성전자 역시 막대한 투자를 이어오고 있었다. 문제는 투자 규모가 아니다. 어디에, 언제, 어떤 위험을 감수하며 투자했는가다. 가장 안전한 선택을 반복하는 동안 시장은 이미 다른 기업들이 만든 새로운 질서 위에서 움직이기 시작했다.
기업이 커질수록 승부수는 어려워진다. 분기 실적을 관리해야 하고 주주들의 눈치를 봐야 하고 실패의 비용도 과거보다 훨씬 커진다. 그래서 점점 더 예측 가능한 투자, 검증된 시장, 확실한 수익을 찾게 된다.
그러나 반도체도, 스마트폰도, AI도, 우주산업도 모두 누군가가 “지금은 너무 이르다”, “성공 가능성이 낮다”는 평가를 감수하며 던진 승부수에서 시작됐다. 기존의 승률만 계산했다면 그런 투자는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10년 전으로 시계를 돌려 2016년 3월13일, 이세돌 9단은 바둑 AI 알파고와 4국에서 지금도 ‘신의 한 수’로 회자되는 ‘78수’를 두었다. 당시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수였다. 앞서 3번의 대결을 완승한 알파고조차 계산 밖에 있던 그 한 수 앞에서 흔들렸고 결국 첫 패배를 기록했다.
그 한 수는 무모해서가 아니라 그대로 두면 질 수밖에 없었던 상황에서의 선택이었다. 높은 승률을 계산했다면 나오기 어려운 수였지만 판을 뒤집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했던 묘수였다.
산업도 다르지 않다. 묘수를 던진 기업이 시장을 선도할 수 있고 1등 기업도 승부수를 잃는 순간 뒤처질 수 있다. 엔비디아와 SK하이닉스는 결단이 새로운 지위를 확보했고 삼성전자는 안전한 계산이 언제든 혁신의 속도를 늦출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줬다.
산업의 역사는 필요한 순간 빈틈없는 계산을 넘어서는 승부수를 던질 줄 알았던 기업들이 시대를 바꿔왔다. 숫자는 위험을 줄여줄 수는 있어도 미래를 만들어주지는 못한다. 결국 새로운 질서는 언제나 판을 흔드는 한 수에서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