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하이닉스가 외국기업으로는 최대 규모인 265억 달러(약 40조 원)라는 역대급 자금 조달을 성사시키며 미국 증시에 데뷔한다.
최태원 SK그룹 회장은 이번 대규모 자금 확보를 발판으로 인공지능(AI) 시대 메모리반도체 증설 경쟁에서 주도권을 굳히고 글로벌 투자자 기반 확대를 통해 장기 성장동력 확보에 속도를 낼 것으로 예상된다.
최태원 SK그룹 회장. ⓒSK
7월10일 SK하이닉스는 ADR 발행 가격을 1주당 149달러로 확정했다고 공시했다. 9일 서울외국환중개가 최초 고시한 매매기준율인 1509.90원/달러를 적용하면 한화로는 1주당 22만4975원이다. ADR 1주가 한국 보통주 10분의 1에 해당한다는 점을 고려하면 ADR 주당 가격은 9일 코스피의 SK하이닉스 보통주 종가 218만6천 원보다 2.9% 높은 수준이다.
SK하이닉스는 모두 1억7790만 주를 상장한다. 이에 따라 SK하이닉스가 ADR 상장을 통해 조달하는 자금은 모두 265억 달러(40조231억 원)으로 확정됐다.
앞서 블룸버그는 8일 SK하이닉스 종가(207만6천 원)를 기준으로 공모 규모를 245억 달러(약 37조1400억 원) 수준으로 예상했었다. 주가 상승으로 당초 예상을 웃돌면서 외국기업의 미국 증시 상장 사례 가운데 역대 최대 규모의 기업공개(IPO) 타이틀을 SK하이닉스가 쥐게 됐다.
미국 전체 IPO 기준으로도 최근 전례 없는 자금을 조달한 스페이스X(857억 달러)에 이어 두 번째로 큰 규모다. 수요예측에서 7배에 이르는 청약이 몰리는 등 SK하이닉스를 향한 글로벌 자본의 기대감을 읽을 수 있는 셈이다.
최태원 회장은 그동안 SK그룹의 AI 관련 사업의 본진이라고 볼 수 있는 SK하이닉스의 ADR 상장을 직접 챙겨왔다. SK하이닉스의 상장이 최 회장의 발언대로 글로벌 투자자들의 접근성을 높여 또 다른 성장을 바라볼 수 있는 전환점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SK하이닉스는 최초 ADR 상장 추진 보도를 놓고 2025년 12월10일 “자기주식을 활용한 미 증시 상장 등 기업가치 제고를 위한 다양한 방안을 검토하고 있지만 확정된 내용은 없다”며 처음으로 공식 입장을 내놨다.
이후 최 회장은 2026년 3월16일(현지시각) 미국 캘리포니아주에서 열린 엔비디아 연례 개발자회의(GTC 2026)에서 “한국 주주들뿐 아니라 미국 및 글로벌 주주들에게 노출될 수 있어 더 글로벌한 회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며 가능성을 높게 점치는 답변을 통해 ADR 상장을 처음으로 언급했다.
최 회장은 꾸준히 2030년까지 공급부족이 이어질 것이라고 내다보며 투자의 필요성을 강조해왔고 이는 SK하이닉스가 수십조 원을 단번에 조달할 수 있는 ADR 상장으로 이어졌다는 평가가 나온다.
최 회장은 한국시각으로 10일 오후 10시15분 미국 뉴욕에서 열리는 SK하이닉스의 나스닥 시장 상장 행사(오프닝 벨)에 직접 참석해 기업의 비전과 중장기 성장전략도 소개한다.
SK하이닉스의 이번 나스닥 상장은 단순히 일회성 현금 유입을 넘어 자금조달 체력 자체를 글로벌 ‘톱(Top)티어’ 수준으로 높인다는 의미가 크다.
한국 증시의 고질적 문제인 ‘코리아 디스카운트’를 넘어서 미국에서 글로벌 동종업계 기업들과 동일한 잣대로 평가받는, 기업가치 재평가를 통해 중장기적으로 적은 지분 활용으로도 기존보다 훨씬 많은 자금을 끌어들일 수 있는 계기가 되기 때문이다.
또 세계 최대 자본시장인 미국에서 외국기업으로 역대 최대 규모로 증시에 상장했다는 점과 맞물려 글로벌 신뢰도를 높일 것이라는 기대감이 커지고 있다. 대외 신용도 상승에 따라 향후 금융비용을 낮춰 자금조달의 허들을 낮출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글로벌 회사채 발행 및 금융기관 차입이 한결 수월해지는 셈이다.
최 회장은 삼성전자, 미국 마이크론과 메모리반도체 ‘빅3’로서 단일 사업에서도 최소 수십조 원의 투자가 필요한 메모리반도체 증설 경쟁에 더욱 전력투구할 기반을 갖추게 됐다.
최근 ‘AI 버블(거품)’을 향한 우려가 종종 제기되고 있지만 반도체업계 의견을 종합하면 중장기적으로는 여전히 메모리반도체 공급 부족이라는 대전제는 변하지 않는 상황으로 파악된다.
최근 잉여 컴퓨팅 용량 판매로 AI 버블에 불을 지핀 메타의 대규모 투자 결정이 나오면서 AI 투자 사이클이 여전히 유효하다는 시선이 다시 커지고 있다. AI 자산 확보가 지속하는 한 고대역폭메모리(HBM)를 비롯한 고성능 메모리반도체 수요도 구조적으로 확대할 가능성이 큰 것이다.
9일(현지시각)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메타는 자체 설계한 AI 칩 양산에 돌입하고 2026년 7GW(기가와트) 규모의 컴퓨팅 인프라를 구축하기로 했다. 또 2027년에도 추가 7GW의 컴퓨팅 인프라 용량 확대를 예고했다. 8일에는 캐나다 앨버타주에 13조7천억 원을 들여 1GW급 데이터센터 건설하기로 결정하기도 했다.
마크 저커버그 메타 최고경영자(CEO) 역시 블룸버그와 인터뷰에서 “컴퓨팅 역량을 우리가 사용하는 대신 임대하거나 거래를 고려하는 것이 합리적일 수도 있다”며 현재 보유한 모든 컴퓨팅 용량을 가동하고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잉여 컴퓨팅 자원이 남는 것이 아닌 수익성 측면에서 고려한 결정이라며 AI 투자 둔화설에 정면으로 반박한 것이다.
여기에 SK하이닉스 경쟁사 마이크론도 AI 버블 우려를 불식시키며 증설 경쟁에 불을 지폈다.
마이크론은 9일(현지시각) AI 메모리 수요 급증에 발맞춰 2035년까지 미국에 팹(Fab) 및 기술 투자 규모를 2500억 달러(약 375조 원) 이상으로 확대한다고 발표했다. 6월 발표했던 투자계획을 500억 달러나 재차 높인 수치다.
SK하이닉스의 ADR 상장을 하루 앞둔 상황에서 나온 투자 발표인데 이는 시기적으로 경쟁사인 SK하이닉스를 견제하는 것이라는 시선이 나온다. 그만큼 증설과 그에 따른 고객사 선점 경쟁이 치열하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SK하이닉스는 글로벌 AI 메모리 수요에 선제적으로 대응하기 위해 국내에서 용인과 청주, 서남권을 아우르는 모두 1100조 원의 중장기 투자 전략을 수립해뒀다.
2045년 완공 예정이던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에서는 일정을 12년 앞당겨 2033년까지 4번째 팹의 건설을 완료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후 설비와 장비의 단계적 투자를 통해 모두 600조 원이 투입된다.
또 청주의 낸드 증설, 신규 팹 건설과 HBM 후공정을 담당하는 패키징 역량 강화에 100조 원이, 새로운 SK하이닉스의 생산 거점으로 낙점된 서남권 클러스터에는 400조 원이 투자된다.
최 회장은 6월29일 서울 종로구 청와대에서 열린 ‘대한민국 대도약 3대 메가프로젝트 국민보고회에서 반도체 공급 확장을 위한 SK하이닉스의 1100조 원 투자계획을 발표하며 “마치 어린아이가 나이를 먹어가고 경험이 늘수록 기억이 점점 많아지는 데 이처럼 AI도 성능과 사용이 계속 늘어난다면 메모리반도체 수요도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한게 된다”고 설명했다.
최 회장은 “이미 메모리반도체 시장은 공급이 부족하고 이 상태는 더욱 심화할 것으로 예상되는데 지나친 공급부족은 가격 상승과 더불어 미래 시장을 축소할 우려가 있다”며 “이런 장애를 초래하지 않고 지속가능한 시장을 안정적으로 조성하기 위해서는 지속가능한 성장 토대를 만들어야 하고 메모리반도체 공급을 늘려야 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