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조(謹弔)'는 죽은 이를 애도하는 말이다. 그러나 이제는 살아 있는 이들을 향한 가장 강한 항의의 언어가 됐다.
연예기획사와 공공기관, 학교 앞에 세워지는 근조화환은 신뢰를 잃은 결정과 대응에 대한 강도 높은 비판의 상징으로 자리 잡았다.
가수 하림. ⓒ연합뉴스
최근 서울 배재고등학교 앞에 늘어선 근조화환도 같은 맥락에서 등장했다.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조롱하는 구호 논란 이후 학교의 대응과 야구부의 행동에 대한 비판, 책임 촉구의 의미를 담은 것이다. 이에 맞서 극우 진영에서 배재고를 지지한다면서 축하 화환을 보내면서 학교 앞은 또 다른 대립의 공간이 됐다.
이진숙 의원이 지난 5일 페이스북에 배재고에 축하화환을 보냈다고 글과 함께 사진을 올렸다. ⓒ이진숙 페이스북
다만 항의와 비판의 언어에 제한이 없을 순 없다. 화환을 비판의 수단으로 사용하는 것에 대해서도 자성의 목소리도 나왔다. 특히 학생들이 등하교하는 학교라는 공간에 설치된 화환이라는 점에서 리본에 적힌 문구의 적절성이 문제가 됐다.
광주 출신의 가수 하림은 6일 '꽃으로 하는 고약한 짓들'이라는 제목의 페이스북 글에서 배재고 앞에 놓인 화환들을 언급하며 "언젠가부터 정치적 공격을 근조 화환으로 하는 기괴한 문화가 생겼다"고 지적했다.
1일 서울 강동구 배재고 앞에 근조화환이 놓여 있다. ⓒ연합뉴스
그는 근조화환을 보내는 것을 두고 "죽음을 연상시켜 받는 이의 기분을 망치겠다는 악의적 의도"라며 "화환의 리본들은 거리에 그대로 노출된 '오프라인 댓글'과 같다"고 지적했다.
이어 "정치적 이슈에 편승하려는 응원의 (축하)화환도 마찬가지"라며 "꽃은 누군가를 때리는 데 쓰는 게 아니"라고 강조했다.
하림은 "누가 무슨 잘못을 했든 간에, 그 혐오의 잔재 사이를 뚫고 등교하는 아이들이 어떤 기분을 느끼겠는가"라며 "세상은 원래 이렇게 서로를 미워하는 곳이라고 아이들이 무의식중에 학습하게 두렵다"고 주장했다.
가수 하림이 6일 페이스북에 배재고 앞에 놓인 근조 화환에 대해 자신의 의견을 글로 남겼다. ⓒ하림 페이스북
이 같은 발언에 "니가 뭔데"라는 비판이 따라붙었다. 하림은 8일 페이스북에 "내 글 하나를 두고 기묘한 서커스가 벌어졌다"며 "5·18 유족인 내게 누군가는 '일베'라 하고 동시에 누군가는 '좌파'라 손가락질한다"고 적었다.
이어 "이로써 나는 그들 사이에서 5·18 유족이자 동시에 일베가 되었다"며 "코미디가 아닐 수 없다"고 했다. 하림은 자신의 외삼촌이 5·18 민주화운동 당시 군인에게 폭행을 당한 뒤 평생 후유증을 앓다가 세상을 떠났다고 밝힌 바 있다.
하림은 "거리의 혐오를 걱정하고 스러져간 이들을 애도하는 마음에 대단한 명함은 필요 없다"며 "내가 '누구'라서 말하는 게 아니라 인간이라면 '누구라도' 말할 수 있는 당연한 권리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어 "저울질하는 사람들 틈에서 내가 가진 작은 추 하나를 어디에 얹느냐는 시민으로서의 자유이자 예술가로서의 의무"라고 설명했다.
가수 하림이 8일 페이스북에 배재고 근조 화환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글로 남겼다. ⓒ하림 페이스북
앞서 지난달 29일 제81회 청룡기 전국고교야구대회에서 배재고 야구부 선수들은 상대인 광주제일고를 향해 "스타벅스 가야지"라는 응원 구호를 외쳐 5·18 민주화운동을 조롱·폄훼했다는 논란에 휩싸였다.
하림은 싱어송라이터이자 음악가이며, 독특한 음색과 서정적인 음악으로 알려져 있다. 1990년대 후반부터 활동을 시작했고, 신치림의 멤버로도 활동했다. 대표곡으로는 '출국' 등이 있으며, 피아노, 기타뿐 아니라 아코디언, 하모니카 등 여러 악기를 연주하는 뮤지션으로 유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