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노정 SK하이닉스 대표이사 사장이 AI 메모리 시장 수성에 속도를 낸다. 경쟁사들의 추격이 거세지는 가운데 고대역폭메모리(HBM) 경쟁력을 입증하고 미국주식예탁증서(ADR) 상장을 통한 최대 45조 원 규모의 자금조달까지 더해 기술과 공급 역량 모두 강화한다는 전략을 두고 있다.
곽 사장은 차세대 HBM4E(7세대) 기술력을 앞세워 주요 고객사와 협력을 확대하는 동시에 대규모 시설투자로 장기 공급 경쟁력을 높여 AI 메모리 리더십을 굳히는 데 총력을 기울일 것으로 예상된다.
곽노정 SK하이닉스 대표이사 사장. ⓒSK하이닉스
6월29일 증권업계에 따르면 SK하이닉스가 최근 주요 고객사에 차세대 AI 메모리인 HBM4E 12단 샘플 공급을 개시하며 그동안 시장에서 제기되던 차세대 제품의 대역폭 한계 및 경쟁력을 향한 우려를 불식시켰다는 평가가 나온다.
SK하이닉스는 앞서 6월18일 초고성능 D램 신제품인 7세대 HBM4E 샘플을 주요 고객사들에게 공급했다고 발표했다.
SK하이닉스가 공급한 HBM4E의 샘플은 핀(Pin) 1개당 1초에 최대 16Gbp(기가비트)의 데이터 처리 속도를 구현하고 에너지 효율을 20% 이상 개선한 것이 특징이다.
또 진화한 MR-MUF 공정을 적용해 12단 적층 기준 48GB(기가바이트) 용량을 구현하면서 구조 안정성을 높였다. MR-MUF는 반도체 칩을 쌓아 올린 뒤 칩과 칩 사이 회로를 보호하기 위해 공간 사이에 액체 형태의 보호재를 주입하고 굳히는 공정이다. 적층 과정에서 생기는 휨 현상을 해결하고 방열 성능 및 양산성을 개선한 SK하이닉스의 독자적 패키징 공법이다.
SK하이닉스는 베이스 다이(가장 바닥의 기단 역할을 하는 칩) 선단화 지연에 따른 시장의 의구심을 받고 있었는데 핀당 최대 16Gbps의 우수한 데이터 전송 속도로 이를 정면 돌파했다는 분석이 나온다. 또 입증된 공정을 적용해 HBM 시장에서 핵심으로 꼽히는 안정적 수율을 확보할 기반을 마련했다는 점도 높게 평가된다.
정우성 LS증권 연구원은 6월29일 SK하이닉스 분석보고서에서 “지금까지 SK하이닉스는 베이스 다이 선단화에 상대적으로 보수적이었던 만큼 차세대 제품 대역폭 경쟁력에 관한 우려가 존재했는데 이번 샘플 공급으로 이 문제를 상당 부분 해소했다”며 “또 양산성이 검증된 공정을 지속해서 적용해 수율 리스크를 낮추면서 성능을 높였다는 측면에서 우위도 유지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런 기술력을 바탕으로 SK하이닉스는 지금까지 엔비디아용 HBM 시장에서 확보하던 ‘최대 공급자 지위’를 2027년까지 유지할 가능성이 높다는 평가도 받고 있다.
SK하이닉스가 차세대 HBM 제품에서 기술력을 확인했다는 점은 곽 사장에게 적지 않은 성과로 여겨진다. 곽 사장은 메모리 시장의 주도권을 놓지 않는 데 가장 핵심으로 HBM 경쟁력을 내세우고 있다.
곽 사장은 2026년 사업방향을 설명하며 HBM의 기술력과 앞선 시장 지위를 강조하기도 했다. 곽 사장은 3월25일 열린 제78기 정기 주주총회에서 “HBM4, HBM4E, 고객 맞춤형 cHBM(커스텀 HBM)을 차질 없이 준비하고 AI D램 및 AI 낸드로 시장 주도권을 강화하겠다”고 다짐했다.
곽 사장의 HBM 경쟁력 확보는 과거만큼이나 앞으로도 SK하이닉스에 더욱 중요해지고 있다는 시선이 나온다.
SK하이닉스가 70%까지 점유하던 HBM 시장은 삼성전자와 마이크론이 후발주자로서 점유율을 빠르게 확장해 나가면서 춘추전국시대가 도래하는 것 아니냐는 전망이 나오기 때문이다.
특히 삼성전자는 2026년 2월 6세대 제품인 HBM4를 세계 최초로 양산 출하하고 최근 업계 최초 매출 10억 달러를 돌파했다는 소식까지 전해졌다. 차세대 제품인 HBM4E 샘플 출하 역시 5월29일로 SK하이닉스보다 3주가량 앞서기도 했다.
6월25일 시장조사업체 카운터포인트리서치가 발표한 ‘분기별 세계 메모리 시장점유율’에 따르면 2026년 1분기 매출 기준 글로벌 HBM 시장 점유율은 SK하이닉스가 58%로 1위를 차지했다. 각각 21%로 뒤를 이은 삼성전자와 마이크론을 큰 격차로 따돌린 것이다.
다만 1년 전과 비교해 SK하이닉스 점유율이 69%에서 11%포인트 축소된 것을 보면 HBM 후발주자들의 추격이 거센 것으로 파악된다. 카운터포인트리서치도 “삼성전자가 엔비디아에 HBM4를 처음으로 납품해 점유율을 빠르게 높여갈 것”이라며 “HBM4의 본격적 공급과 매출 반영은 2026년 하반기부터 가시화할 것”이라고 치열한 경쟁을 점쳤다.
곽 사장이 새롭게 준비하고 있는 무기는 최대 45조 원을 조달하기 위한 미국주식예탁증서(ADR) 상장이다. 글로벌 자본 시장에서 대규모 실탄을 확보해 경쟁사들의 투자 속도를 웃돌고 기술 경쟁력을 굳히겠다는 전략으로 풀이된다. ADR은 미국이 아닌 다른 나라의 기업 주식을 미국 은행에 예치하고 이를 바탕으로 발행돼 미국 증시에서 달러로 거래되는 주식예탁증서를 말한다.
SK하이닉스는 7월10일 나스닥 상장, 7월14일 청약 및 대금 납입 등의 일정으로 ADR 상장을 추진하고 있다.
SK하이닉스는 조달한 막대한 자금을 생산역량을 극대화하고 차세대 공정 양산 대응을 위한 설비 확보에 투입한다는 계획을 세우고 있다. SK하이닉스의 증권신고서를 보면 45조 원가량의 유동성은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 1기 팹 건설(31조 원), 청주 P&T(패키지앤테스트)7 어드밴스드 패키징 팹 건설(19조 원), 극자외선(EUV) 반도체 장비 취득(11조9천억 원) 등의 재원으로 모두 활용된다.
특히 HBM 시장의 경쟁에서 기술의 우위와 함께 안정적 공급 역량 확보에 따른 장기공급계약(LTA)이 중요해지는 상황에서 AI 메모리 주도권을 유지하기 위한 생산능력 확대가 시장의 큰 주목을 받고 있다.
SK하이닉스는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를 글로벌 고객 수요에 선제적으로 대응하고 안정적 공급 체계를 강화하기 위한 전략적 생산거점으로 삼고 있다.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 1기 팹은 골조(건물) 2개와 클린룸 6개로 구성되고 최초 클린룸은 2027년 2월 오픈을 앞두고 있다.
청주 P&T7은 HBM 등 AI 메모리 제조에 필수인 어드밴스드 패키징 팹으로 SK하이닉스가 새로운 AI 메모리 핵심 단지로 육성하고 있는 곳이다. 인근 M15X에서 생산한 제품을 넘겨받아 HBM으로 최종 조립하는 거점 역할을 하는 것이다. 2027년 말 완공을 목표로 공사가 진행되고 있다.
김록호 하나증권 연구원은 6월26일 SK하이닉스 분석보고서에서 목표주가를 기존 275만 원에서 360만 원으로 높여 잡으며 “향후 (장기공급계약에 따른) 2027년 HBM 가격 상승분을 반영하면 추가적으로 영업이익 전망치를 상향해야 한다”며 “ADR 상장 일정이 확정됐고 장기공급계약 관련 실적은 리스크가 적기 때문에 더 높은 기업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다”고 평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