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위에는 장사 없다'는 말처럼 살인적 폭염 앞에서 프랑스 역시 결국 에어컨이 필수 생활 가전으로 자리 잡아가고 있다.
아직 6월이지만 40도에 달하는 역대급 폭염이 프랑스를 덮치면서 에어컨 사용이 정치적 논쟁의 중심으로 떠올랐다.
한 시민이 2026년 6월24일(현지시각) 프랑스 파리 에펠탑 근처 트로카데로 분수에서 더위를 식히고 있다. 프랑스는 연일 40도가 넘는 폭염에 시달리고 있다. ⓒAP/연합뉴스
25일(현지시각) BBC는 '프랑스가 가장 더운 날을 기록한 이후, 에어컨이 정치적 분열을 만들다'라는 제목의 기사를 통해 폭염이 불러온 에어컨 사용 논쟁을 전했다.
프랑스의 에어컨 보급률은 약 25% 수준으로, 여름철 냉방이 일상화된 한국 등과는 뚜렷한 차이를 보인다.
한국은 아파트 거주 비중이 높은 특성상 에어컨 보급률이 90% 이상으로 대부분 가정에 최소 1대 이상이 갖춰져 있다. 특히 거실과 안방은 물론 방마다 에어컨을 설치한 경우도 적지 않아, 여름철 생활 필수 가전으로 자리 잡았다.
에어컨은 적고 폭염은 길어진 도시, 물가로 향하는 파리 시민들
2026년 6월24일 프랑스 파리에서 기록적인 폭염이 이어지는 가운데 관광객들이 루브르 박물관을 방문하고 있다. 높은 기온으로 인해 루브르 박물관은 폭염이 끝날 때까지 오후에 문을 닫기로 했다. ⓒEPA/연합뉴스
반면 프랑스의 학교와 병원 등 핵심 시설 상당수는 냉방 설비가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다.
프랑스의 에어컨 보급률이 낮은 이유는 여러 요인이 겹쳐 있다. 우선 프랑스는 그동안 우리나라만큼 여름철 폭염이 길고 습하게 이어지진 않았다. 이에 에어컨이 필수 가전으로 자리 잡을 필요성이 크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에어컨은 '필수 인프라'라기보다 전력 소비가 큰 소비재로 인식돼 왔다.
또한 오래된 건물 비중이 높아 에어컨 설치 자체가 쉽지 않은 환경도 보급률을 낮춘 요인으로 꼽힌다.
이 같은 구조적 배경 속에서 폭염이 이어지자, 파리 시민들은 찜통 같은 더위를 피하기 위해 생마르탱 운하에 뛰어들어 다이빙을 하거나 수영을 하며 몸을 식히고 있다. 에어컨이 충분히 보급되지 않은 도심에서 기온이 급격히 오르자, 프랑스 파리 시내를 가로지르는 인공 운하가 임시 피서지로 활용되고 있는 것이다.
생존 인프라로 변한 에어컨, 늘어나는 수요와 깊어지는 논쟁
프랑스 파리 시민들이 2026년 6월23일 화요일 파리 생마르탱 운하에서 더위를 식히고 있다. 이날 프랑스 기상청 메테오 프랑스는 전국 약 절반에 해당하는 54개 주에 폭염 적색 경보를 발령했다. ⓒAP/연합뉴스
이제 프랑스에서도 과거에는 필요성이 낮았던 냉방 인프라가 기후변화로 인한 폭염의 심화와 함께 점점 생존 인프라에 가까운 성격으로 바뀌고 있다.
프랑스 전역에서 냉방기기 수요가 급증하면서 품귀 현상도 나타나고 있다. 대형 유통업체 까르푸는 지난 22일(현지시각) 하루 동안 선풍기와 에어컨 약 3만 대를 판매했다고 밝혔다. 또한 세계 최대 전자상거래 기업 아마존의 프랑스 내 냉방기기 판매량은 지난주 기준으로 전년 동기 대비 두 배 이상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폭염으로 프랑스에서는 수천 개 학교가 문을 닫았고, 의료진과 간호 인력들은 근무가 불가능할 정도라고 고통을 호소하고 있다. BBC 보도에 따르면, 프랑스 브르타뉴 지역 낭트에 건설 중인 대형 병원 역시 병실의 절반에만 에어컨을 설치할 계획인데, 이에 대해 의료 노조는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프랑스 사회는 오랫동안 에어컨을 기후변화의 근본적인 해결책이라기보다 임시적인 완화 수단이자 악화 요인으로 바라봐 왔다. 특히 환경주의자와 좌파 진영은 에어컨이 에너지 소비를 늘리고 온실가스를 증가시킨다며 비판적인 입장을 유지해왔다.
하지만 최근 상황은 달라지고 있다. 프랑스 녹색당 대표 마리 통델리에는 "학교와 병원에는 에어컨이 필요하다. 이제는 에어컨 없이는 버틸 수 없는 공간들이 있다"며 기존의 금기를 깨뜨렸다.
환경운동 진영의 기존 논리는 분명하다. 에어컨은 폭염의 고통을 일시적으로 줄여주지만, 근본적인 기후변화 해결책은 아니라는 것이다. 전력 소비 증가로 인한 화석연료 사용 확대, 에어컨에 쓰이는 냉매 가스의 온실효과, 에어컨 실외기를 통해 배출되는 열이 도시 온도를 끌어올리는 열섬 현상까지 여러 문제가 복합적으로 얽혀 있다.
에어컨을 둘러싼 논쟁, 찬반에서 벗어나 확대 방식과 책임으로 이동하다
2026년 5월28일(현지시각) 프랑스 남서부 수스통에서 한 남성과 아이들이 유리 지붕이 있는 이르 베르트 초등학교 복도 아래에 서 있다. 이 학교는 폭염의 영향으로 5월28일과 29일 오후 문을 닫았다. 2026년 6월 또다시 새로운 폭염이 시작되면서, 시장들은 전년도와 같은 딜레마에 직면했다. 수업 중단과 일부 학부모의 반발을 감수하고 학교를 폐쇄할 것인지, 아니면 아이들의 건강을 희생하면서 학교를 계속 운영할 것인지 선택해야 하는 상황이다. ⓒAFP/연합뉴스
정치적으로는 우파가 에어컨 확대에 더 적극적이다. 극우 성향의 마린 르펜이 이끄는 국민연합(RN)은 최근 학교와 병원에 에어컨을 대대적으로 보급하자고 촉구했다. 이 계획에는 약 300억 유로(약 44조 원) 규모의 정부 대출을 통해 3000만~4000만 가구가 냉방 설비를 설치하도록 지원하는 방안도 포함돼 있다.
이를 바라보는 비판의 시각도 있다. 정책의 실현 가능성과 재원 마련 방법이 불분명한 데다 기후변화 대응에 뒤늦게 합류한 극우 정치가 이를 정치적으로 활용하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에어컨 문제는 더 이상 선택의 영역에 머물지 않고 있다. 생존을 위협하는 폭염 속에서 학교와 병원이 한계에 내몰리면서 프랑스 정치권의 논쟁도 에어컨 사용의 찬반 구도를 넘어 확대의 범위와 방식을 두고 갈라지고 있다.
한편 로이터통신은 이번 유럽 폭염이 '오메가 정체(Omega blocking)'라고 불리는 기상 현상 때문이라고 전했다. 이 현상은 그리스 문자 Ω(오메가)처럼 중앙에 고기압이 자리하고 양옆에 저기압이 형성되면서 공기의 흐름이 막히는 것으로, 마치 하늘에 뚜껑이 덮인 것처럼 더운 공기가 빠져나가지 못하게 된다. 그 결과 서유럽 상공에는 사하라 사막에서 올라온 뜨거운 공기가 그대로 갇혀 폭염이 이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