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년 동안 영국 총리는 여섯 번이나 바뀌었지만, 권력의 중심지 '다우닝가 10번지'의 실세는 따로 있었다고 한다. 주인공은 고양이 ‘래리’다.
키어 스타머 영국 총리(왼쪽)와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오른쪽)이 2026년 6월7일 영국 런던 다우닝가 10번지 밖에서 사진 촬영을 위해 떠나는 래리 고양이를 바라보고 있다. ⓒEPA/연합뉴스
길고양이였던 래리는 지금 영국 권력의 중심부인 다우닝가 10번지에 살고 있는데, 정권과 총리가 계속 교체되는 정치 변동 속에서도 굳건히 자신의 자리를 키지고 있다. 래리는 '내각부 수석 쥐잡이(Chief Mouser to the Cabinet Office)'이라는 공식 직함도 갖고 있다. 래리는 지난 2월15일 영국 정부의 공식 '쥐잡이 고양이'로 임명된 지 15주년을 맞기도 했다. 비공식 '퍼스트 캣'인 셈이다.
래리는 2011년 2월15일 당시 데이비드 캐머런 총리에 의해 다우닝가에 입성했다. 이후 테리사 메이, 보리스 존슨, 리즈 트러스, 리시 수낙, 키어 스타머까지 총리가 여섯 차례 교체되는 동안에도 자리를 지켰다. 총리실의 주인은 계속 달라졌지만 다우닝가 10번지 현관을 지키는 고양이는 한 번도 바뀌지 않았다.
다우닝가 10번지는 영국 총리의 공식 관저이자 집무실로, 영국 정치 권력이 실제로 작동하는 중심 공간이다. 총리는 이곳에서 내각 회의를 주재하고 외교·안보를 포함한 국가 주요 결정을 내린다. 그래서 다우닝가 10번지는 영국 권력의 중심을 상징하는 공간으로 받아들여진다.
래리 고양이가 2026년 6월24일(현지시각) 런던 중심부 다우닝가 10번지 현관 앞 그늘에서 앉아 있다. ⓒAFP/연합뉴스
래리는 '신스틸러'로도 유명하다. 외국 정상 방문이나 주요 정치 이벤트 같은 결정적 순간이면 어김없이 등장해 카메라의 시선을 가져간다. 악수 장면을 찍으려는 찰나 프레임에 슬며시 끼어들거나, 현장을 가로질러 아무렇지 않게 주인공 자리를 빼앗는다.
래리의 존재감은 때로 국제 외교 무대의 긴장감까지 흐트러뜨린다. 남자들에게는 까칠한 반응을 보이기도 하지만,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에게는 비교적 호의적이었고,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 방문 당시에는 현장 분위기를 누그러뜨리는 장면으로 화제가 됐다.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 방문 때는 의전 차량 ‘비스트’ 아래로 들어가 낮잠을 자는 모습으로도 주목받았다.
래리는 외무부의 또 다른 고양이 '팔머스턴'과 라이벌 관계로도 유명했다. 두 고양이는 여러 차례 충돌 장면이 포착됐고, 결국 팔머스턴은 2020년 은퇴한 뒤 버뮤다에서 '고양이 관계 자문(feline relations consultant)'으로 지내다 최근 세상을 떠났다.
이제 래리는 19세의 고령 고양이지만 여전히 건재하다. 복도를 느릿하게 순찰하고, 라디에이터 위 창틀에서 가장 편안한 자세로 낮잠을 즐긴다. 다우닝가의 시간은 바뀌어도, 래리의 루틴만큼은 거의 변하지 않는다.
'내각부 수석 쥐잡이 고양이' 래리가 2026년 6월22일(현지시각) 런던 다우닝가에서 기자들에 둘러싸여 있다. 이는 키어 스타머 영국 총리가 사임을 발표한 직후의 상황이다. ⓒAP/연합뉴스
최근 다우닝가 10번지에는 한 번의 권력 교체가 찾아왔다. 키어 스타머 영국 총리가 22일(현지시간) 총리직 사임을 공식 발표했다. 스타머 총리는 같은 날 오전 런던 다우닝가 10번지 총리 관저 앞에서 대국민 연설을 통해 “총리직에서 물러나겠다”고 밝혔으며, 국왕 찰스 3세에게 이 결정을 직접 전달했다고 말했다.
그는 2024년 7월 총선에서 노동당의 압승을 이끌며 정권 교체를 완성한 뒤 총리로 취임했지만, 약 2년 만에 자리에서 물러나게 됐다. 차기 총리는 이르면 다음 달 중순, 늦어도 8월 31일 이전에 취임할 것으로 전망된다. 현재 집권당인 노동당이 하원 650석 중 과반인 403석을 차지하고 있어, 곧 진행될 당 대표 선거에서 선출되는 신임 당 대표가 그대로 차기 총리직을 맡게 될 것으로 보인다.
다우닝가 10번지의 '집사'는 또 한 번 바뀌지만, 그 문턱을 지키는 존재는 늘 그대로다. 래리는 어떤 정권에도 속하지 않는다. 보수당이든 노동당이든 총리가 누구로 바뀌든 그는 같은 자리에서 같은 방식으로 머문다. 정치가 흔들릴수록 오히려 더 선명해지는 존재, 누구의 편도 아니지만 누구보다 오래 남는 고양이. 다우닝가 10번지의 권력은 계속 바뀌어도, 그 문턱을 지키는 존재는 언제나 래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