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 영국의 현대미술 거장 데이비드 호크니의 장례식이 단 두 명만 참석한 채 비공개로 치러졌다.
'21세기의 피카소'로 불릴 만큼 60년 넘게 현대미술계에 큰 영향을 끼친 거장의 마지막은 조용하고 소박했다.
데이비드 호크니. ⓒAP=연합뉴스
21일(현지시각) 가디언은 호크니의 홍보 담당자 에리카 볼턴을 인용해 그의 장례식이 이미 비공개로 치러졌다고 보도했다.
장례식에는 호크니의 생전 뜻에 따라 오랜 파트너인 장피에르 곤살베스 드 리마(61)와 조카손자인 사진작가 리처드 호크니(33)만 참석했다. 그 외 세부 사항은 공개되지 않았다.
두 사람은 모두 호크니가 2008년 설립한 데이비드 호크니 재단의 이사이기도 하다. 볼턴은 "호크니의 장례 절차와 추모식에 대해 많은 문의를 받았다"며 "그의 분명한 뜻은 장례식에 파트너와 조카손자만 참석하고, 두 사람의 사생활이 존중되는 것이었다"고 밝혔다.
이처럼 조촐하게 치러진 장례식은 생전 호크니가 보여준 삶의 태도와도 맞닿아 있다.
그는 1990년 영국 정부가 수여하려던 기사 작위를 거절했다. 이후 2003년 한 지역지와 나눈 인터뷰에서는 "나는 요란한 일을 좋아하지 않는다"며 명예나 격식보다 자신의 삶과 작업에 집중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데이비드 호크니 '더 큰 첨벙'. ⓒ서울시립미술관
데이비드 호크니 '클라크 부부와 퍼시'. ⓒ서울시립미술관
데이비드 호크니 '예술가의 초상(두 사람이 있는 수영장)'. ⓒAP=,연합뉴스
그의 이러한 태도는 젊은 시절부터 이어져 왔다. 1959년 입학한 런던 왕립예술대학(RCA)에서 그는 일찌감치 '문제아'로 불렸다. 여성 모델을 그리라는 과제를 거부하고 미국 보디빌딩 잡지에 실린 근육질 남성들을 그렸기 때문이다.
당시 영국에서 동성애가 범죄로 취급되던 시절이었지만 그는 '함께 부둥켜안은 우리 두 소년' 등 작품에 자신의 성 정체성을 숨김없이 담아냈다. 또한 "화가는 그림으로 평가받아야 한다"며 졸업에 필요한 논문 제출을 거부했고, 학교는 결국 그에게 졸업장을 수여하기 위해 규정을 변경했다.
호크니는 이후에도 끊임없이 새로운 표현 방식을 탐구했다. 1980년대에는 폴라로이드 사진 수십 장을 이어 붙인 포토 콜라주 작업을 통해 전통적인 원근법과 카메라가 세상을 인식하는 방식의 한계를 실험했다.
회화에만 머물지도 않았다. 그는 오페라 무대와 의상을 디자인했고, 복사기와 팩스를 활용해 작품을 제작하는 등 새로운 매체를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일흔이 넘은 뒤에는 아이패드로 그림을 그리며 디지털 기술을 예술 창작에 접목하는 모습도 보여줬다.
이처럼 호크니는 특정 화풍이나 기법에 머무르지 않고 평생 새로운 시도를 이어가며 현대미술의 영역을 확장했다. 개방적인 사고와 실험 정신은 그를 '21세기의 피카소'로 불리게 만든 원동력이었다.
대표작으로는 '더 큰 첨벙', '예술가의 초상(두 사람이 있는 수영장)', '클라크 부부와 퍼시', '더 블루 기타', '노르망디에서의 한 해'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