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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혼 관계의 동성 부부로 형성된 생활공동체가 있다면, 그 관계를 깨뜨린 외도에 법적 책임을 물을 수 있을까? 

7년 함께 산 동성 커플, 외도로 무너진 관계에 책임을 물을 수 있을까? : 법원은 '성별'보다 '관계'에 의미 뒀다
서울중앙지법 앞에 서 있는 여성의 이미지. AI 합성 이미지

7년을 함께 산 동성 커플의 관계는 외도로 무너졌고, 법원은 그 파탄에 법적 책임을 물었다.

서울중앙지법 민사3-2부(부장판사 김소영·장창국·문종철)는 5일 동성 커플 A씨가 자신의 연인이었던 B씨, 그와 부정한 관계를 맺은 C씨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서 "피고 C씨는 원고 A씨에게 1000만 원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A씨와 B씨는 7년간 함께 살아온 동성 커플이었다. 단순한 동거를 넘어 양가 부모가 서로 왕래할 정도로 가족처럼 지내온 관계였다. 동성 커플이었기에 법적으로 혼인신고를 할 수는 없었지만, 삶의 대부분을 공유하며 사실상 부부로서 생활했다. 각자의 급여를 모아 생활비는 물론 부모님 용돈과 대출 이자까지 함께 책임지며 사실상 하나의 경제공동체를 이뤘다.  

그 관계에 균열이 생긴 것은 2024년 6월부터였다. B씨는 C씨와 부정한 관계를 맺기 시작했고, B씨는 같은 해 9월 A씨에게 이별을 통보했다. 7년간 유지되던 관계는 그렇게 끝났다.

이후 A씨는 심리적 고통을 호소했다. 2024년 11월에는 불안장애 진단을 받았다.

A씨는 "한 사람이 이별을 통보하는 순간, 그 관계는 어떤 법적 절차도, 제도적 장치도 없이 한순간에 사라졌다"며 "우리 사회의 시스템이 한 인간의 실존에 대해 이토록 가혹할 필요는 없다는 생각에 소송을 시작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최소한의 법적 보호를 통해 관계의 취약성을 완화하고 구성원의 최소한의 존엄을 지켜야 한다는 마음이었다"며 "우리 사회가 어떤 공동체는 보호하고 어떤 공동체는 보호하지 않는지 법원에 질문을 던지고 싶었다"고 밝혔다.

법원은 B씨와 교제한 C씨의 책임 여부를 살폈다. 재판부는 C씨가 B씨와 교제할 당시 적어도 'A씨와 혼인한 유부녀'라는 인식이 있었을 것으로 판단했다. 재판부는 "C씨는 자신이 B씨와 교제함으로써 A씨와 B씨 관계가 파탄에 이를 수 있다는 점 자체는 충분히 인지할 수 있었다"며 C씨의 배상 책임을 인정했다.

법원, 동성 커플도 '사실혼 유사 생활공동체' 인정

이번 사건의 쟁점은 외도 상대방의 책임 인정에 그치지 않았다. A씨와 B씨의 관계 자체를 법적으로 보호할 가치가 있는 생활공동체로 볼 수 있는지가 사건의 핵심이었다. 1심은 A씨의 청구를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2심은 달랐다. 동성 커플이라 하더라도 일정한 요건을 갖춘 경우 사실혼에 준하는 생활공동체로 인정될 수 있다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동성 간에 형성된 사실혼 유사 생활공동체 역시 법률상 보호할 가치가 있는 이익으로서 보호돼야 한다고 봄이 타당하다"며 "동성의 두 사람 사이에서 주관적으로 혼인 의사의 합치가 이뤄지고 이성 간의 사실혼 관계와 실질적 차이가 없는 경우에도, 관계의 파탄을 초래한 제3자의 손해배상책임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동성 커플의 행복 추구권 내지 평등권을 외면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고 바라봤다.  

재판부는 또 2024년 대법원 전원합의체가 사실상 혼인관계에 있는 동성 배우자를 건강보험 피부양자로 인정하지 않은 것은 '차별'에 해당한다고 판단한 판례의 법리도 함께 언급했다.

다만 재판부는 이번 판단이 '동성 간 법률혼 또는 사실혼 자체의 인정' 문제와는 구별된다고 선을 그었다. 동성 간 법률혼 내지 사실혼 관계의 성립을 인정하는 문제와 사실혼 유사 생활공동체를 보호 가능한 법적 이익으로 평가하는 문제는 다른 국면에서 논의돼야 한다는 것이다. 

"평등을 향한 중요한 이정표" 

소송대리인 김의지 변호사는 이번 항소심 판결을 두고 "동성 동반자 관계 역시 법이 보호해야 할 가치 있는 결합임을 사법부가 확인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며 "법원이 변화하는 사회의 현실을 외면하지 않고 한 걸음 내디뎠다는 점에서 이번 판결을 평등을 향한 중요한 이정표로 평가한다"고 밝혔다.

그동안 동성 커플은 사실혼으로 인정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관계 파탄에 대한 법적 구제를 받기 어려웠다. 외도 이후 책임 소재를 둘러싸고 분쟁이 발생해도 법적 보호의 공백 때문에 책임은 물을 수 없었다. 이번 판결은 향후 유사한 분쟁에서 법원이 어떤 기준으로 판단할 것인지 보여준 중요한 선례가 될 것으로 보인다. 

특히 해당 판결은 결혼 제도 자체의 변화 여부와는 별개로, 이미 존재하는 관계를 어디까지 법이 보호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법적 대답이 되는 셈이다.

법정 밖에서 보면 이 사건은 외도로 인해 관계가 파탄난 뒤 제3자에게 위자료를 청구한 사건처럼 보인다. 이번 판결 안에는 사랑과 동거, 가족과 공동체, 법이 어디까지 인간의 관계를 따라잡을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 담겨 있다. 이번 판결은 그 질문에 대해 아주 조심스럽지만 분명한 한 줄을 남겼다. 보호의 기준은 관계의 성격이지, 성별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줬다.  

환영 목소리 속 남은 과제들 "평등한 혼인 제도" 

7년 함께 산 동성 커플, 외도로 무너진 관계에 책임을 물을 수 있을까? : 법원은 '성별'보다 '관계'에 의미 뒀다
해당 판결 이후 동성결혼 법제화, 혼인평등 실현을 위해 활동하는 조직인 '모두의 결혼'은 6월9일 성명을 발표했다. ⓒ모두의 결혼 엑스 계정

판결 이후 시민단체들은 이를 환영하면서도 동시에 우리 사회가 넘어야 할 다음 단계에 대해 목소리 높였다. 동성결혼 법제화, 혼인평등 실현을 위해 활동하는 조직인 '모두의 결혼'은 9일 성명을 통해 "한 사람의 관계가 법 앞에서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취급되어서는 안 된다는 확인이자 동성 부부의 삶과 관계가 이미 우리 사회 안에서 보호받아야 할 생활공동체의 실질을 이루고 있음을 보여주는 판단"이라고 설명했다.

단체는 이어 "가족으로서의 법적 지위, 상속, 세제, 주거, 의료, 돌봄, 체류, 사회보장 등 혼인이 부여하는 수많은 권리는 여전히 동성 부부에게 닫혀 있다"며 "평등한 혼인제도와 가족으로서의 법적 지위를 보장하는 입법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헌법적 책무"라고 강조했다.

"판결문 뒤에도 사람이 있다" 

한편 이번 판결이 사회에 미칠 영향에 관심이 쏠리는 가운데, 사건 당사자에 대한 존중을 당부하는 목소리도 나왔다. 

'한국 국적 유부녀 레즈비언'으로 자신을 소개해 온 김규진씨는 10일 소셜미디어 엑스(X, 옛 트위터)를 통해 "이 사건에 대해 말 얹을 때 꼭 생각해야 할 건, 솔직히 개인사건이라 비공개 신청을 해도 아무 문제 없는 걸 커뮤니티를 위해 열람할 수 있도록 내놓으신 것"이라며 "그런 의미에서 원고에게 존중과 감사의 마음을 보내는 것이다. 판결문 뒤의 글자가 아니고 다 사람이라는걸 잊지 않았으면 한다"고 글을 올렸다. 

동성 배우자와의 결혼 생활과 임신·출산 경험을 공개적으로 알려온 성소수자 활동가 김규진씨는 사건 당사자인 원고 A씨를 향한 차별적·혐오적 반응을 경계하며, 존중과 감사의 마음으로 판결을 바라봐 달라고 당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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