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와 독일의 차세대 전투기 공동개발이 9년 만에 좌초되고, 독일 해군의 차세대 함정(프리깃함) 사업도 주계약자 교체론이 불거지면서 유럽 재무장의 현실적 한계가 드러나고 있다.
유럽은 러시아의 위협과 미국 트럼프 행정부의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탈퇴 움직임에 재무장을 서두르고 있지만, 대형 방산 프로제트들이 국가별 이해와 주도권 다툼으로 삐걱거리고 있다.
이런 혼선은 한국 방위산업에 단기적으로 기회가 될 수 있지만, 장기적으로는 유럽의 '역내 방산물자 우선 조달'이라는 정책이 강화되면서 부정적으로 작용할 가능성도 점쳐진다.
프랑스·독일·스페인이 공동 개발하려던 차세대 전투기 모형이 2023년 6월 프랑스 파리 국제 에어쇼 행사장에 전시돼 있다. ⓒ AFP통신=연합뉴스
10일 독일매체 슈피겔과 프랑스 르몽드 등 외신보도를 종합하면 프랑스와 독일의 차세대 전투기(FCAS) 공동개발사업이 최종적으로 무산된 것으로 파악된다.
독일 정부는 최근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과 프리드리히 메르츠 독일 총리는 차세대 전투기 공동제작에 합의하지 못할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며 "메르츠 총리가 마크롱 대통령에게 이 사업을 계속하지 말자고 제안했다"고 밝혔다.
프랑스와 독일의 차세대 전투기 개발은 2017년 7월 마크롱 대통령과 앙겔라 메르켈 당시 독일 총리의 합의로 시작됐다. 그리고 2019년에는 메르켈 전 총리의 권유로 스페인도 참여했다.
독일과 프랑스, 스페인은 2040년까지 1천억 유로(한화 약 175조 원)을 들여 기존 주력 전투기를 대체할 스텔스 전투기를 양산한다는 목표를 세운 바 있다.
유럽 재무장의 잡음 : 주도권 다툼과 문화 차이가 초래한 리스크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앞쪽)과 프리드리히 메르츠 독일 총리가 2025년 11월18일 독일 베를린에서 공동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 로이터=연합뉴스
이번 차세대 전투기 개발사업의 좌초는 프랑스 방산기업 다쏘와 프랑스·독일·스페인 정부가 공동출자한 항공기 회사 에어버스 사이 갈등이 심해진 것이 1차적 원인으로 꼽힌다.
다쏘는 설계 주관사로서 자신들이 전투기 개발을 주도하겠다고 주장한 반면 에어버스는 동등한 주도권을 갖기를 원해 거리가 멀어진 것으로 알려졌다. 이 밖에 기술이전, 지식재산권, 요구 성능에서도 갈등이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독일매체 도이치벨레(DW)는 이를 두고 리더십과 군사적 우선순위, 산업 통제권 분쟁에 빠진 것이 이번 프로젝트 좌초의 주된 원인이라고 짚었다.
차세대 전투기 개발 무산뿐만 아니라 독일 해군의 함정(F126 프리깃함) 건조 사업도 유럽 재무장의 또 다른 취약 지점을 보여준다.
파이낸셜타임스에 따르면 이 사업은 네덜란드 조선사 다멘이 따냈지만, 독일 정부의 까다로운 조달 절차와 소프트웨어 문제가 엮이면서 심각한 지연과 비용 증가를 낳았다.
구체적으로 독일 정부는 모든 문서를 독일어 종이문서로 요구했고, 영어로 제출된 도면은 일괄적으로 반려한 것으로 전해진다. 다멘도 해당 프로젝트 착수 직전에 설계 소프트웨어를 바꾸면서 사업 지연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결국 독일 당국이 다멘의 주계약자 지위를 박탈하는 방안을 추진했고, 독일 방산기업 라인메탈이 사업을 넘겨받기 위한 협의를 진행하고 있다고 호주 조선전문매체 베어드 마리타임은 전했다.
프랑스 다쏘가 만든 전투기 미라주2000 ⓒ EPA=연합뉴스
유럽 재무장 과정에서 흘러나오는 잡음이 한국 방위산업에 주는 의미는 남다르다. 유럽의 재무장 속에서 추진되는 공동개발 프로젝트의 마찰비용이 예상보다 크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유럽 싱크탱크 브뤼겔은 "유럽 국방시장은 자국 우선주의 성향으로 말미암아 파편화돼 있고 통합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며 "유럽은 소규모의 자국 시장을 보호하기 보다 더 큰 통합을 지향해야 안보적 관점에서 평안을 얻을 수 있다"고 분석했다.
하지만 브뤼겔이 지적하는 '유럽 방산시장의 통합'은 상당한 시간이 소요될 수밖에 없다. 이는 곧장 단기적 전력공백으로 이어질 수 있다. 이에 한국과 같이 빠른 납기와 가격경쟁력, 대량 공급능력을 갖춘 외부 공급자에게 기회가 열릴 수 있다.
다만 그 기회를 장기적 호재로 곧바로 해석하기는 어렵다. 유럽의회 조사처가 정리한 유럽방위산업전략(EDIS)은 유럽국가 사이 방산물자 공동조달의 확대와 유럽 내 생산기반 강화, 제3국 의존 축소를 기본방향으로 잡고 있기 때문이다.
유럽의 재무장 잡음은 한국 방위산업에 단기적으로는 수출의 창을 여는 계기가 될 수 있지만, 장기적으로 유럽은 '방위산업 독립'을 강력하게 추진할 것을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