힙합의 디스 문화에 성역은 없을 수 있지만, 최소한의 선마저 지워버릴 권리는 없다. 표현의 자유가 곧 고인에 대한 모욕이나 공동체의 상처를 깊이 건드려도 된다는 면죄부가 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을 비하하는 가사로 도마 위에 오른 래퍼 리치 이기(본명 이민서·20)의 공연 파문이 걷잡을 수 없이 번지고 있다. 논란이 커지자 공연 참가 라인업에 이름을 올렸던 선배 래퍼들은 뒤늦게 "몰랐다"라며 고개를 숙였다.
래퍼 리치 이기가 유튜브 채널 'NFL RECORDS 및 Rich Iggy'에 출연하고 있다. ⓒ유튜브 채널
래퍼 딥플로우(본명 류상구, 41)는 19일 "나이도 있으신 힙합씬 베테랑 분이 왜 그런 선택을 하신 건지 도통 모르겠다"는 팬의 DM에 "솔직히 그 숫자의 의미를 전혀 몰라서 포스터를 봐도 연관짓지 못했다"고 답했다.
딥플로우는 이날 인스타그램 스토리를 통해 "DM으로 하도 욕이 와서 자초지종을 늦게 파악했는데 저도 상식선에서 몹시 화가 나고 황당하다"고 밝혔다.
그는 "몰랐더라도 프로로서 또 업계의 고참으로서 제 나이브함에 책임을 크게 느낀다"며 "그동안 무분별한 협업을 참 많이 해왔는데 돌아보는 계기가 된다"고 말했다.
래퍼 딥 플로우가 19일 인스타그램 스토리에 입장문을 올렸다. ⓒ딥플로우 인스타그램
또 다른 래퍼 팔토알토(본명 전상현, 42)는 20일 인스타그램에 입장을 올리고 고개를 숙였다. 그는 "그동안 저는 음악적 교류의 의미로 그의 작업에 참여하고 방송에 초대해 왔지만, 그 과정에서 표현의 문제성과 그것이 누군가에게 어떤 상처가 될 수 있는지 충분히 생각하지 못했다"며 "저의 판단이 부족했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저는 고인을 조롱하거나 혐오적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표현들, 그리고 많은 사람들에게 상처를 줄 수 있는 가사와 태도에 동의하지 않는다"며 "그것을 옹호하거나 지지할 생각도 없다"고 선을 그었다.
또한 "저의 부족한 인식과 무지로 인해 불편함과 실망을 느끼신 분들께 진심으로 사과드린다"며 "저는 앞으로도 창작자로서 표현의 자유를 중요하게 생각하겠다. 하지만 동시에 제가 만드는 음악과 활동이 누군가에게 상처보다 긍정적인 영향으로 남을 수 있도록 더욱 신중하게 고민하겠다"고 밝혔다.
최근 온라인 커뮤니티와 SNS에서는 지난해 8월 공개된 유튜브 콘텐츠 '슈즈오프 팟캐스트' 속 더콰이엇(본명 신동갑, 41)의 발언도 다시 확산되며 논란이 이어지고 있다.
해당 영상에서 래퍼 오메가 사피엔은 래퍼 리치 이기와 유튜버 최홍철 등을 언급하며 "예전 일간베스트 저장소에 나올 법한 커뮤니티 감성으로 노무현 대통령 이야기를 한다든지, 페미니스트에 관한 이야기를 한다든지 이 정도는 가야 사람들이 새로운 자극을 느낀다. '와우, 이거 하드하다(강하다)' 이렇게 느끼는 것"이라고 평가했다.
이어 프로듀서 조준호가 "요즘 사회적으로 누르면 안 되는 부분들을 건드리는 흐름을 재밌게 보고 있다"고 말하자, 더콰이엇은 "늘 금기를 건드리는 거죠. 그게 힙합이고 그게 젊음이잖아요"라고 답했다.
또 더콰이엇은 "우리가 사실 모두에게 사랑받으려고 이 일을 하는 건 아니"라며 "몇 명만 좋아해 주면 된다. 근데 그 사람들이 정말 미칠 수 있는 소수여야 변할 수 있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래퍼들의 해명에 팬들은 싸늘한 반응을 보였다. 이들은 "이쯤이면 선배로서 공연을 말렸어야 하는 거 아닌가", "주변 반응이 심각해져가니까 모르는 척 하는 거 봐라", "요즘 힙합이 안 멋지고 추한 이유" 등의 의견을 내놨다.
앞서 고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17주기인 오는 23일 예정됐던 래퍼 리치 이기의 힙합 공연은 결국 취소됐다. 해당 공연은 서거일인 23일 오후 5시23분, 서울 마포구 성미산로 연남스페이스에서 열릴 예정이었다. 날짜와 시간, 티켓 가격(5만2300원) 모두 고인의 서거일과 관련된 숫자였다. 이 콘서트에는 리치 이기 외에도 팔로알토, 노엘, 더콰이엇 등 다수의 래퍼가 출연자로 이름을 올렸다.
노무현재단이 공연에 대한 법적 대응을 시사하자 공연장과 공연 기획사는 각각 입장문을 내고 공연 취소를 결정했다. 당사자인 리치 이기도 같은 날 오후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자필 사과문을 게시했다. 리치 이기는 자필 사과문을 노무현 시민센터를 방문해 전달했다.
래퍼 리치 이기가 19일 인스타그램에 자필 사과문을 올렸다. ⓒ리치 이기 인스타그램
그는 "데뷔 초부터 최근까지 저의 음악과 가사를 통해 고인을 조롱하고 비하하는, 대중들과 관련 유가족분들이 보시기에 눈살이 찌푸려질 만한 언행을 단지 유명세를 위해 일삼아 왔다"며 "저로 인해 많은 어린 친구들과 대중이 영향을 받았음에 저 또한 저의 행실과 부주의를 깊이 반성하고 있다"고 했다.
이어 "앞으로 절대 고인을 조롱하고 비하하는, 또는 이를 희화화하거나 잘못된 방향으로 언급하지 않겠다고 약속드린다"며 "재단 측과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유가족분들께도 진심으로 머리 숙여 사죄의 말씀을 전한다"고 고개 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