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선 현대자동차그룹 회장이 현대차와 기아 등 핵심 계열사 수익성 악화에 '비상 경영' 카드와 함께 로봇과 자율주행 등 고도화한 소프트웨어를 앞세운 기술 역량을 높이는 '8조 원 투자' 승부수를 동시에 던졌다.
정 회장의 결단은 현대차그룹을 전기자동차 분야 '퍼스트무버(선도자)'로 도약시키겠다는 5년 전 74억 달러(약 8조 원) 규모의 투자를 연상케 한다. 정 회장은 소프트웨어 연구개발(R&D) 거점을 세워 전기차 시장에서 거둔 성과처럼 '패스트팔로워(빠른 추격자)'를 넘어 완전한 선도기업으로 거듭나겠다는 의지를 다지는 것으로 보인다.
정의선 현대자동차그룹 회장. ⓒ현대자동차그룹
5일 현대차그룹과 증권업계에 따르면 올해 현대차와 기아가 연간 합산 영업이익 27조 원에 이르렀던 2023~2024년의 고점에 미치지 못하는 수익성을 낼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과거에는 없었던 대미 관세 영향이 반영되는 등 외부 경영환경의 불확실성이 더욱 커졌기 때문이다.
현대차와 기아는 각각 8600억 원, 7550억 원을 합쳐 모두 1조6150억 원 규모의 관세 비용이 반영되면서 1년 전과 비교해 영업이익이 30%가량 감소한 1분기 실적 성적표를 받아 들었다. 각각 1분기 연결기준 영업이익을 보면 현대차는 2조5147억 원, 기아는 2조2051억 원이다.
매출은 역대 최고 수준을 지속해서 경신하고 있지만 영업이익은 당초 시장기대치(컨센서스)에도 소폭 미치지 못한 것이다.
이에 1분기 실적발표 이후 올해 영업이익 전망치가 현대차는 기존 12조 원 후반에서 12조 원 초반으로, 기아도 기존 10조2천억 원에서 10조 원가량으로 하향 조정됐다. 1분기 수익성이 기대에 미치지 못했고 미국과 이란 사이 전쟁에 따른 원가 상승 등의 영향도 지속될 것으로 예측되기 때문이다.
현대차그룹 핵심 계열사가 수익성 확보에 어려움을 겪으면서 정 회장도 사실상의 '비상 경영' 체제로 돌입한 모양새다.
현대차는 앞선 실적을 놓고 "관세 영향 등 수익성 악화를 만회하기 위해 컨틴전시 플랜(비상 계획)을 적극적으로 강화하는 등 미래 경쟁력 및 수익성 확보를 위해 전사적 역량을 집중할 것"이라고 말했다. 기아도 고부가가치 차량 중심의 판매 확대와 함께 다각도의 비용 절감 노력을 강화하겠다고 설명했다.
정 회장은 구체적으로 현대차의 사업계획 수립, 비용 집행 등 지출에 관한 모든 과정을 지금까지 관행에 얽매이지 않고 원점에서 재검토하는 강력한 쇄신책을 빼 들었다.
다만 정 회장은 동시에 국내에 8조 원에 이르는 대규모 투자를 결정하기도 했다. 비상 경영 승부수 속에서도 미래를 위한 투자에는 속도를 늦추지 않는 셈이다.
현대차그룹은 2030년 12월까지 모두 8조 원을 투입해 위례신도시 인근 서울 지하철 8호선 복정역세권에 그룹의 연구개발(R&D) 조직을 집결하는 대규모 거점(HMG퓨처콤플렉스)을 마련하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현대차가 2조8886억 원으로 참여하는 것을 비롯해 기아(2조3635억 원), 현대모비스(1조988억 원), 현대제철(5164억 원), 현대로템(4608억 원)이 출자를 확정했다. 이 계열사들을 제외한 나머지 지분 8.4%, 6670억 원가량은 추후 결정된다.
이번 투자는 소프트웨어 연구개발(R&D)에 방점이 찍혔다. 곳곳에 흩어져 있는 연구 역량을 한데 모아 로보틱스와 자율주행 등 그룹의 미래로 꼽히는 성장동력을 키우는 데 시너지를 내겠다는 복안이다. 완성차 사업이 지닌 성장 한계를 신사업 및 기술 경쟁력으로 극복하겠다는 의지로 풀이된다.
김준성 메리츠증권 연구원은 "현대차의 2024년 역대 최대 실적은 주가 상승을 견인하지 못했고 올해 관세 부과 지속에 따른 실적 급락에도 주가는 역대 최고치를 경신했다"며 "기존 차량 제조·판매 사업은 사양 산업이고 '피지컬 AI' 시장 진입 여부가 주가를 정의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이를 종합하면 정 회장이 '위기 대응 모드' 속에서도 대규모 투자를 단행한 배경에는 로봇과 자율주행 등 완성차를 넘어선 새로운 사업 영역에서 퍼스트무버로서 나아가겠다는 의지가 깔린 것으로 분석된다.
현대차그룹은 정 회장이 지휘봉을 잡은 뒤 시장의 선두업체로 도약하겠다는 전략을 펴고 있다. 특히 전기차 시대가 다가오면서 정 회장의 퍼스트무버 전략이 더욱 강화했다는 평가가 많다.
정 회장은 2021년 임직원에게 보낸 신년 메시지에서 "올해를 미래 성장을 가르는 중요한 변곡점으로 삼아 새로운 시대의 '퍼스트무버'가 되기 위한 만반의 준비를 해야 한다"며 "특히 최근 발표한 전기차 전용 플랫폼(E-GMP)에 기반한 신차 출시에 따라 매력적 친환경 이동수단을 더욱 합리적 가격으로 제공해야 한다"고 말했다. 2020년 10월 회장 취임 뒤 첫 신년 일성에서 선도자로서 입지 및 전기차의 중요성을 함께 강조한 것이다.
정 회장의 국내 소프트웨어 연구개발 거점 투자를 보면 5년 전 행보처럼 선도업체 지위를 차지하겠다는 의지를 확인할 수 있다.
정 회장이 현대차그룹을 한 분야의 선두업체로 성장시키겠다는 의지를 보인 대표적 행보는 전기차 시장을 겨냥해 2021년 5월 결정한 미국 투자 결정이 있었다. 당시 현대차그룹 전기차 현지 생산 등을 위해 미국에 5년 동안 74억 달러를 투입하기로 했다. 이 결정은 현재 현대차그룹의 미국 생산기지 메타플랜트아메리카(HMGMA)로 이어졌다.
현대차그룹 HMGMA 구축을 위한 선제적 투자는 전기차 시장에서 확고한 입지를 다졌을 뿐만 아니라 캐즘(일시적 수요 정체)에서도 하이브리드차로의 전환 등 유연한 생산체계를 가능하게 했다는 시선이 나온다. 다른 완성차업체들이 가동률 저하와 전략 수정에 골몰하고 있는 상황에서 HMGMA는 비교우위를 불러오는 핵심 자산인 셈이다.
특히 현대차그룹은 자율주행 분야에서는 완전자율주행(FSD) 기능을 앞세운 테슬라에 뒤처져있다는 평가가 지배적이지만 그룹 계열사 보스턴다이나믹스를 앞세운 휴머노이드 로봇 사업에서 시장의 큰 기대를 받고 있다.
보스턴다이나믹스는 2028년부터 휴머노이드 로봇 '아틀라스(Atlas)' 3만 대의 양산 체제를 구축하겠다는 계획을 세우고 있다. 이는 현대차그룹 전반에서 생산 효율을 높여줄 뿐 아니라 현대모비스를 포함한 계열사들도 핵심 구동장치인 액추에이터 등 부품 및 시스템을 통해 새로운 전기를 맞이할 전환점으로 꼽힌다.
휴머노이드 로봇 시장에서도 경쟁자로 여겨지는 현대차그룹과 테슬라와 각축전도 더욱 치열해질 것으로 예상된다. 당장은 테슬라가 내년 '옵티머스(Optimus)'의 양산에 돌입하겠다는 방침을 발표하며 다소 빠른 사업 속도를 보이고 있지만 현대차그룹은 풍부한 글로벌 완성차 생산역량에 더해 이익창출력, 글로벌 빅테크와 협력 등에서 우수한 평가를 받고 있다.
강성진 KB증권 연구원은 "자율주행 비전에서는 테슬라가 우월하지만 로보틱스에서는 경쟁 가능한 수준이고 투자 여력에서는 현대차그룹이 앞서는 것으로 판단된다"며 "현대차그룹은 대규모 데이터와 엔비디아의 인프라, 구글과 협업을 통해 로봇 AI를 개발하고 있으며 지난해 영업이익과 영업활동현금흐름을 보면 테슬라가 각각 44억 달러(약 6조4천억 원)와 147억 달러(21조8천억 원)인 반면 현대차그룹은 각각 20조9천억 원과 25조1천억 원이다"고 분석했다.
정 회장은 로보틱스 분야에서 그룹의 미래를 찾겠다는 의지를 강하게 내비치고 있다. 지난달 미국 온라인매체 세마포와 인터뷰에서 "우리의 비전은 첨단 AI를 기반으로 인간과 협업 로봇이 파트너가 되는 시대를 여는 것"이라며 "로보틱스와 AI가 인간과 협력해 생산성과 품질을 높이는 기반을 구축하고 있고 이를 통해 모빌리티 이상의 영역으로 확장해 나갈 것"이라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