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신천변 ‘캐리어 시신 유기 사건’의 피의자와 피해자가 모두 지적 장애인으로 파악됐다.
사건의 전모가 드러날수록 충격은 커지고 있지만, 동시에 이번 사건이 장애인 전반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자극하는 방식으로 소비될 가능성 역시 커지고 있다는 점에서 우려를 낳는다.
2026년 4월 2일 장모를 때려 숨지게 한 뒤 캐리어에 시신을 담아 유기한 혐의로 긴급체포된 20대 사위와 딸이 대구 북부경찰서에서 법원 영장실질심사를 받기 위해 각각 이동하고 있다. ⓒ연합뉴스
대구지법 손봉기 영장전담 부장판사는 2일 오전 10시30분부터 존속살해 및 시체유기 혐의를 받는 사위 조모(27)씨와 시신 유기에 가담한 혐의를 받는 딸 최모(26)씨를 상대로 구속 전 피의자 심문(영장실질심사)을 진행했다. 앞서 조씨 등은 지난달 18일 중구 자택에서 장모를 숨지게 한 뒤 시신을 캐리어에 담아 신천변에 유기한 혐의를 받고 있다.
현재 이 사건과 관련한 기사는 각종 포털과 온라인 커뮤니티를 통해 빠르게 확산하고 있다. 그 과정에서 상당수 보도는 ‘장모를 때려 죽였다’, ‘시신이 든 캐리어를 발로 찼다’, ‘대낮에 걸어서 유기했다’처럼 자극적이고 폭력적인 묘사를 제목 전면에 내세우고 있다.
이 같은 방식의 접근은 사건 자체의 잔혹성을 부각하는 데는 효과적일지 몰라도, 자칫 사건의 본질을 ‘장애’와 결부시켜 사회적으로 왜곡된 인식으로 이어질 수 있다. 범죄는 어디까지나 개인의 행위와 구체적 정황, 그리고 사회적 안전망의 실패 속에서 봐야 할 문제인데, 자칫 복잡한 맥락을 건너뛴 채 특정 집단 전체를 향한 불신과 혐오로 확장되기도 한다.
장애를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
2015년 1월 2살 A군을 난간에서 떨어트려 숨지게 한 발달 장애를 가진 19살 B군. ⓒSBS 뉴스 캡쳐
우리 사회는 이미 장애인을 바라보는 시선에서 오래된 편견과 불안이 배여있다.
대표적으로 2014년 12월 한 발달장애인이 2살 아이를 건물 아래로 던져 숨지게 한 사건이 꼽힌다. 당시 피의자는 재판에 넘겨졌지만, 대법원은 결국 무죄를 선고하고 상대적으로 가벼운 치료감호 명령을 확정했다. 판결의 핵심은 ‘형사 처벌보다 치료와 관리가 우선돼야 하며, 적절한 치료가 없을 경우 재범 위험이 크다’였다.
하지만 대중은 재판부의 차분한 설명보다 감정적 충격에 이끌리는 듯했다. 키 180cm에 100kg에 육박하는 피의자의 거구를 부각하며, 보고도 막을 수 없던 피해자 어머니의 당시 절망적 상황을 세세하게 묘사한 보도들이 이어졌다. 이에 사건은 어느새 ‘장애에 대한 공포’와 ‘잠재적 위험성’이라는 인식으로 굳어졌다.
이런 인식은 지금까지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장애인은 여전히 ‘도움과 배려가 필요한 시민’이라기보다, 누군가에게 불편을 주거나 돌발적 위험을 초래할 수 있는 존재처럼 묘사되는 경우가 많다. 장애인 이동권 시위를 벌여온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전장연)를 둘러싼 여론만 봐도 그렇다. 이동권과 생존권이라는 본질보다, ‘출근길을 막는 집단’이라는 이미지가 부각되면서 장애인 권리 요구 자체를 비난의 대상으로 삼는 언술도 확산했다.
무능이 죄가 될 수 있나?
2025년 4월 장애인의 날을 앞두고 광주 서구 치평동 광주시청 앞에서 광주장애인차별철폐연대 등 장애인 단체 회원들이 권리 보장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진행하고 있다. ⓒ연합뉴스
물론 이번 사건의 잔혹성이 결코 가볍다는 뜻은 아니다. 범죄는 어디까지나 엄정하게 다뤄져야 하며, 피해에 대한 책임 또한 분명히 물어야 한다. 다만 그와 별개로, 우리가 이 사건을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느냐는 한 번 더 짚어볼 필요가 있다. 장애를 마치 ‘죄’와 유사한 문제처럼 바라보는 태도가 과연 타당한가 하는 점이다.
장애는 누군가의 도덕적 결함이 아니다. 인간이 살아가며 누구나 맞닥뜨릴 수 있는 신체적·지적 조건의 한 형태에 가깝다. 사고나 질병, 노화만으로도 누구든 장애를 갖게 될 수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여전히 장애를 개인의 부족함이나 사회적 탈락으로 해석하는 경향이 있다. 이 같은 시선은 결국 “기능하지 못하면 도태돼도 어쩔 수 없다”는 냉혹한 정글의 논리로 이어지기 쉽다.
그러나 현대사회에서 개인이 얼마나 ‘기능할 수 있는가’는 결코 개인의 의지나 능력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교육, 노동, 복지, 의료, 등 사회 시스템이 얼마나 촘촘하게 작동하느냐에 따라 누군가는 자립의 기회를 얻고, 또 다른 누군가는 그대로 낙오한다. 즉 장애를 둘러싼 문제는 개인의 한계라기보다, 사회가 얼마나 그 한계를 함께 감당하고 보완할 준비가 돼 있는가의 문제이기도 하다.
실제로 정부는 매년 장애인 일자리를 확대하고 있으며, 2025년 기준으로도 3만 명대 규모의 일자리를 운영 중이다. 다만 그 상당수가 행정보조나 복지형 단기 일자리에 집중돼 있다는 한계가 있다. 다시 말해, ‘도우려는 정책’은 존재만 할 뿐 실질적인 기능은 없는 간극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일종의 이중잣대로도 보이는 이 같은 도움과 방임 사이 기이한 괴리는 앞서 말했듯이 정책뿐 아니라 개인에게도 드러난다.
통계청이 발표한 ‘2013년 사회조사 결과’에 따르면, 만 13세 이상 가구원 3만8천 명을 대상으로 우리 사회 전반의 장애인 차별 수준을 조사한 결과, 교육·고용 등 생활 전반에서 장애인 차별이 ‘심하다’고 응답한 비율은 66.5%에 달했다. 사회 전체가 장애인 차별 문제를 분명히 인식하고 있다는 의미다.
그러나 자신의 장애인에 대한 차별정도에 대해서는 차별이 ‘심하다’고 생각하는사람은 고작 12%에 불과했다.
어쩌면 우리도 장애인 아닐까?
조던 피턴스 캐나다 토론토대 교수. ⓒ인스타그램
더 멀리 보면, 이 문제는 지금 우리가 규정하는 장애인을 넘어 일반인으로도 확대된다. 기술 발전이 가속화되고, 사회가 점점 더 높은 생산성과 빠른 적응력을 요구하는 방향으로 움직일수록 ‘정상’과 ‘비정상’, ‘유능’과 ‘무능’을 가르는 기준은 더 가혹해질 가능성이 크다.
조던 피터슨 토론토 대학교 심리학과 명예교수는 다수의 팟캐스트 및 강의에서 자동화와 인공지능이 확산할수록, 인지 능력이나 사회 적응력이 상대적으로 낮은 이들이 노동시장 바깥으로 밀려날 수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이 말의 본질은 단순히 지능의 문제가 아니다. 사회가 요구하는 기준에 맞지 못하는 순간, 누구든 ‘쓸모없는 사람’처럼 분류될 수 있다는 경고에 가깝다.
그렇게 본다면, 오늘날 제도권 밖으로 밀려난 중증 장애인이나 경계선 지능인, 사회 적응에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의 문제는 미래의 우리와 완전히 분리된 이야기가 아닐 수 있다. 지금도 진단명이 없거나 ‘애매한 경계’에 있는 사람들은 지원 대상에서 쉽게 제외되고, 도움을 받아야 할 순간에도 “그 정도는 장애가 아니다”라는 말 속에서 방치되곤 한다.
기술이 더 발전하고 경쟁이 더 치열해질수록, 사회가 ‘유능한 사람’만을 기준으로 설계된다면 언젠가 배제와 낙인의 대상은 훨씬 넓어질 수밖에 없다. 그때 가서 장애는 더 이상 타인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모두가 맞닥뜨릴 수 있는 사회적 위치가 될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