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 업계에 조금이라도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2024년 9월에 미국의 투자회사 모건스탠리가 한 진단을 기억할 것이다. 모건스탠리는 다음해인 2025년 9월에는 "올해는 따뜻한 겨울이다"고 했고, 삼성전자·SK하이닉스의 주가는 올해 2월 22만·109만 원을 넘기며 신고점을 갱신했다.
그러나 3월24일 구글이 '터보퀀트' 기술로 메모리 사용량을 6분의1까지 줄일 수 있었다고 발표했다. 이에 메모리 수요가 크게 저하될 것으로 예상되면서 진짜 '메모리 겨울'이 닥쳐올 거라는 우려가 퍼지기 시작했다. 반도체주가 일제히 급락하면서 이러한 우려를 가시화했다.
그럼에도 '메모리 겨울'은 오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인공지능(AI)이 급속도로 발전하면서 터보퀀트가 '대홍수 재앙'이 아닌 '가뭄의 단비'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1일 반도체 업계에 따르면 터보퀀트의 도입에도 기존 AI 사업자들의 메모리 수요 감소 효과가 미미할 것으로 보여 삼성전자·SK하이닉스의 펀더멘털은 굳건하다. ⓒ 허프포스트코리아
1일 반도체 업계에 따르면 터보퀀트가 도입돼도 기존 AI 사업자들의 메모리 수요 감소 효과는 미미할 것으로 보인다.
터보퀀트가 메모리 수요를 6분의1로 줄이는 게 아니라 오히려 AI 성능의 6배 향상을 불러일으킬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이미 구글·앤트로픽·오픈AI와 같은 기존 AI 업계 선두주자들이 AI 성능 향상을 위해 메모리 활용에 집중하고 있다. AI 모델 자체 성능 개선이 어려워지자 생각의 사슬(Chain of Thought, CoT) 등의 피드백 기술로 AI가 답변을 스스로 고도화해 최적의 답변을 내놓도록 하는 것이다.
이 모든 과정이 메모리에 KV(Key-Value) 캐시 형태로 저장된다. KV 캐시는 AI가 이전 대화나 자신의 답변을 검토하는 과정에서 사용하는 작업 메모리로 AI의 '기억력'이라고 볼 수 있다.
구글이 3월24일 발표한 터보퀀트가 바로 이 KV 캐시를 최대 6분의1까지 손실 없이 압축할 수 있는 기술이다. 구글의 발표로 투자자들이 메모리 수요의 급감을 예측하면서 대표적 메모리 제조사인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주가가 25일 하루만에 각각 4.7%, 6.2% 급락하기도 했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투자자들의 터보퀀트 기술 이해에 큰 오류가 있다고 설명한다.
이승우·박재환 유진투자증권 연구원은 "터보퀀트는 메모리 효율성을 높일 수 있는 보다 발전된 도구로 그 가치는 충분해 보인다"면서도 "하지만 AI 추론에서 메모리 사용을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는 파괴적 변수로 보는 것은 과도한 해석이다"고 설명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목표 주가도 계속해서 높은 수준으로 유지되는 중이다.
박유악 키움증권 연구원은 삼성전자 주가를 두고 "KV 캐시 압축 기술은 단기 메모리 수요에 부정적 요인이지만 고대역폭 메모리(HBM)에서 기술 경쟁력 우위를 점한 삼성전자에게는 HBM 시장 점유율 확대의 기회요인이 될 것이다"며 "고점 대비 급락한 현재 주가는 투자의 기회가 될 것이다"고 분석했다.
김영건 미래에셋증권 연구원은 1일 "SK 하이닉스 펀더멘털의 훼손은 제한적이라는 판단으로 매수 의견과 목표 주가 154만 원을 유지한다"며 "메모리 가격도 고점 대비 5~7% 하락하는 수준에 그치고 있어 시장이 우려하는 수요 충격이 현실화되고 있다고 보기 어렵다"고 설명했다.
터보퀀트가 이미 구글이 지난해 4월28일 논문을 통해 발표했던 기술이라는 점도 중요하다. 당시에는 KV 캐시 압축의 중요성이 지금보다 훨씬 떨어져 터보퀀트가 주목받지 않았다.
터보퀀트의 주목도를 끌어올린 건 지난 1년간 급속도로 발전한 AI 에이전트다. AI 에이전트는 명령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대용량 메모리를 필수적으로 요구한다.
2025년 11월25일 오스트리아의 개발자 페터 슈타인베르거가 AI 에이전트 오픈클로(OpenClaw)를 출시해 AI 에이전트 시장에 일약 파란을 일으켰다. 애플의 맥 미니(Mac mini)가 '가성비 대용량 메모리'로 주목받아 오픈클로 사용에 최적인 것으로 알려지면서 1월에는 품귀 현상을 빚기도 했다.
2월4일 AI 에이전트 시장에 파란을 일으킨 오픈클로(OpenClaw)의 개발자인 페터 슈타인베르거의 모습. ⓒ CC0
그러나 개인이나 중소기업이 AI 에이전트를 적극 활용하기엔 어려움이 있었다. AI 에이전트를 보안 걱정 없이 이용하려면 자체 서버 구축이 필수적이다. 그러나 서버 구축 비용은 수천만 원을 호가하고 서버 컴퓨터는 크고 시끄러워 별도의 공간이 필요하다.
이제 터보퀀트로 인해 개인·중소기업도 훨씬 더 저렴하고 작은 AI 에이전트를 구비할 수 있게 된다. AI 에이전트 진입장벽이 크게 낮아져 메모리 수요 다각화와 AI 대중화가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숀 킴 모건스탠리 애널리스트는 "터보퀀트는 메모리의 효율을 높이는 것이다"며 "오히려 AI 서비스의 확산과 대중화에 기여해 메모리 수요 증가로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