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 단위로 쏟아지는 숏폼 콘텐츠의 홍수, 1.5배속 시청과 '스킵(Skip)' 버튼이 미덕이 된 시대다.
빠르고 강렬한 자극에 길들여진 현대인들은 이른바 '팝콘브레인'을 안고 살아간다. 팝콘이 튀겨지듯이 도파민이 쏟아지지 않으면 만족할 수 없게 되어버린 현대인의 뇌. 속도전이 되어버린 일상 속에서 몰입의 깊이는 얕아졌고, 사유를 위한 공백은 점차 증발하고 있다.
붉은사막이 제시하는 '세계'는 아주 천천히 게이머들의 망막을 가득 채운다. ⓒ 붉은사막 공식 출시 트레일러 영상 갈무리
이 숨 가쁜 가속의 시대에 등장한 펄어비스의 신작 '붉은사막'은 무척이나 이질적인 경험을 선사한다. 이 게임은 유저의 뇌를 손쉽게 '도파민'으로 이끌지 않는다. 대신 하나의 거대한 세계에 온몸으로 부딪히며 서서히 스며들게 만드는 '탐험'의 방식을 택했다.
심지어 그 탐험 역시 매우 불편하다. 캐릭터는 내 조작에 빠릿하게 반응하지 않고, 물건을 하나 집기 위해서는 그 물건이 무슨 물건인지 알아보는 과정이 필요하다. 버튼 하나로 순식간에 수십 개의 아이템을 주워서 배낭(인벤토리)에 넣을 수 있는 '빠른' 게임들과는 궤를 완전히 달리한다.
붉은사막은 출시 초기만 해도 쏟아지는 혹평을 피하지 못했다. 느리고 답답하다는 이유가 주를 이뤘다. 하지만 출시 후 열흘이 넘게 지난 지금, 분위기는 반전되고 있다. '붉며들었다(붉은사막에 스며들었다)'는 유저들의 간증이 줄을 잇고 있다. 이미 100시간을 플레이 했는데도 300시간, 500시간을 더 이 세계에 빠져들고 싶다는 사람들이 한가득이다.
제작진이 직조해 낸 세계에 아주 느리게, 하지만 흠뻑 빠져드는 이들이 늘고 있다는 사실은 이 팝콘브레인의 세상에서 대단히 흥미롭고 이색적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다.
왜 전 세계의 수많은 게이머들은 '붉며들고' 있는가. 그 이유를 나는 즉각적 도파민 보상보다 중시되는 '과정'의 이야기, 그리고 그 속에서 흩어진 현대인의 집중력을 긁어모으는 '몰입의 복원'에서 찾고 싶다.
말의 고삐를 단단히 쥐고 광활한 평원을 달리는 행위, 그러다 문득 멈춰서 스쳐 가는 풍경을 바라보는 시간, 마을 곳곳을 누비는 수많은 NPC들의 사연에 하나하나 다가가는 과정은 일종의 '디지털 명상'으로 작용한다. 펄어비스가 설계한 불편함은 유저로 하여금 가속페달에서 발을 떼게 만들고, 모니터 너머의 디지털 세계를 단순한 데이터 덩어리가 아닌 실재하는 공간으로 인지하게 만든다.
물론 게임 전반에 깔린 느릿한 동작과 번거로운 조작, 지나치게 긴 동선이 펄어비스의 정교한 '느림의 철학'인지, 아니면 그저 시스템 최적화 실패와 편의성 설계 미숙의 결과물인지 모호하다는 비판은 뼈아프다. "의도한 것이 아니라 그저 게임을 다듬지 못한 것 아니냐"는 일각의 지적은 분명 타당한 구석이 있다.
그럼에도 역설적으로 흥미로운 것은, 이것이 고도로 의도된 미학이든 정돈되지 않은 투박함이든 간에 이 불편한 호흡 자체가 현대의 팝콘브레인들에게 묘한 자극과 환기를 선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다만, 한 가지 짙은 아쉬움이 남는 대목은 이 경이로운 탐험의 길목에서 마주하는 '서사'의 풍경이다.
진정한 느림에 기꺼이 몰입하기 위해서는 그 묵직한 속도를 견뎌낼 만한 이야기의 무게가 동반되어야만 한다.
락스타게임즈의 명작 '레드 데드 리뎀션 2' 역시 초반부 눈길에서의 답답한 행군으로 붉은사막과 비슷한 비판을 받은 바 있다. 그 지독한 불편함을 견디지 못하고 하차했다는 '간증'은 지금도 수도 없이 쏟아진다.
그러나 레드 데드 리뎀션2는 그 불편함을 무너져가는 무법자 시대의 처절한 황혼, 주인공 아서 모건의 고독과 속죄, 구원(리뎀션)이라는 장엄한 서사와 완벽하게 결합해 거대한 감동으로 승화시켰다. 아주 간단한 서브 퀘스트 하나도, 아서 모건이라는 캐릭터에게 흠뻑 빠져들게 하는 장치로 기능했다.
아서 모건의 이야기가 끝나고, 더 나아가 존 마스턴의 이야기마저 끝난 뒤에도 오랜 시간 멍하니 화면만 바라보게 만들고, 기어코 아서가 가장 행복했던 시절로 돌아가 다시금 그 세계를 유랑하게 만드는 여운. 그것이 레데리2가 증명한 느림의 가치였다.
반면 붉은사막의 서사는 얄팍하다. 부족한 개연성과 뜬금없는 전개는 유저가 이 아름다운 세계에 정서적으로 닻을 내리는 것을 수시로 방해한다. 주인공 클리프가 이 거대한 서사속에서 왜 뜬금없이 팔씨름을 하고 빗자루질을 해야하는지 유저를 이해시키지 못한다. 서사 속에 억지로 '튜토리얼'을 끼워넣은 느낌이다.
화려한 그래픽과 세밀한 상호작용, 그리고 눈 앞에 펼쳐진 판타지의 세상이 유저의 '망막'을 깨우는 데는 성공했을지 몰라도, '영혼'을 울리기엔 이야기의 밀도가 턱없이 부족하다.
빠른 것만이 유일한 정의처럼 여겨지는 시대에 '머무름의 미학'을 일깨워 팝콘브레인들에게 잠시나마 숨 쉴 틈을 내어준 펄어비스의 시도는 마땅히 박수 받을 만하다. 글로벌 웹진들에게서 '제발 이 불편함을 수정하지 말아달라'라는 아이러니한 평가가 나오는 것은, 펄어비스가 제시한 느림이 여러 팝콘 브레인들에게 어떤 울림을 줬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다만 펄어비스에게 한 가지 바라는 것이 있다면 좀 더 치밀한 기획과 이야기다. 펄어비스의 다음 여정에서는 압도적으로 구현된 세계가 멈춰 세운 유저의 발걸음을, 깊고 진한 '이야기'가 단단히 붙잡아 주기를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