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윤범 고려아연 회장이 올해 정기 주주총회에서 거둔 '판정승'을 바탕으로 미래를 건 미국 통합제련소 투자에 집중할 것으로 예상된다.
최 회장과 영풍·MBK파트너스 연합의 경영권 분쟁이 장기화 흐름으로 고착되면서 오히려 주주들과 시장의 관심은 '표대결'에 따른 경영권보다는 고려아연 경영진이 얼마만큼 회사의 미래가치를 높이는 데 주력하는지로 이동하는 모양새다.
최윤범 고려아연 회장. ⓒ연합뉴스
11조 원이 투입될 미국 통합제련소 건설은 현재 고려아연이 추진하는 사업 가운데 단연 핵심으로 꼽힌다. 최 회장은 단순히 생산거점을 넓히는 것을 넘어 글로벌 공급망 안정화에도 기여하겠다는 포석을 둔 만큼 이 사업을 본궤도에 올리는 것이 중요할 것으로 보인다.
25일 재계 안팎에 따르면 올해 정기 주총에서도 이어진 최 회장과 영풍 측의 고려아연 경영권 분쟁은 최 회장 측이 승리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최 회장이 사내이사로 선임돼 다시 이사회에 합류하게 됐고 향후에도 이사회를 절반 이상으로 채울 가능성이 커졌기 때문이다.
◆ 최윤범 회장의 판정승, 중장기 경영권 방어도 가능해진다
전날 열린 고려아연 제52기 정기 주주총회에서는 양측의 분쟁에서 핵심이었던 '집중투표에 의한 이사 선임의 건'과 '이사 선임의 건' 세부 투표가 최 회장 측의 의도대로 마무리됐다.
먼저 최 회장 측의 우호세력인 유미개발은 이사 5인 선임을 제안했고 영풍 측은 이보다 더 많은 6인을 제안했다. 각 주주가 보유한 의결권에 선임할 이사 수를 곱한 만큼 표를 배분할 수 있는 집중투표제는 선임할 이사수가 많을수록 여러 명에게 표가 분산될 가능성이 커 영풍 측에 유리하게 작용하기 때문이다.
당초 최 회장 측이 40%가량, 영풍 측이 42%가량 고려아연 지분을 들고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5인 선임 때는 영풍 측이 2명, 6인 선임 때는 영풍 측이 3명의 이사를 선임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됐다. 이 안건은 최 회장 측에서 제안한 5인 선임으로 결정됐다.
이어 이사 선임의 건에서도 기존 예측대로 최 회장 측 후보였던 사내이사 최 회장과 사외이사 황덕남 이사회 의장, 고려아연과 미국 정부 합작법인인 크루서블JV이 제안한 월터 필드 맥라렌 기타비상무이사가 이사회에 합류했다. 영풍 측이 제안한 후보에서는 2명의 선임 안이 통과됐다.
아직 최 회장 측에서 보면 불완전한 승리라는 시선도 나온다.
영풍 측에서 제안한 다른 다수의 안건이 부결됐지만 분리선출 감사위원 1명을 추가하려는 최 회장 측의 안건도 통과하지 못했다. 이에 9월 상법 개정 이전에 다시 임시 주총을 열어 안건을 통과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됐다. 이사회 구성으로도 최 회장과 영풍 측이 각각 기존 11대4 구도에서 9대5로 변했다. 여전히 최 회장 측이 과반은 확보했지만 격차는 좁혀진 것이다.
또 고려아연이 주총 직전 집중투표제 아래 해외 기관투자자가 일부만 행사하고 남은 표를 비례적으로 재분배하는 방식(프로 라타)을 채택하겠다고 한 일을 놓고 영풍 측은 주주의 의사를 왜곡했다는 이유로 가처분(임시처분) 신청을 고려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영풍은 이사회 구성을 두고 "최 회장 측이 과반을 유지했지만 견제와 균형이 작동하는 구조로 전환됐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향후 이사 선출 구조나 이번 주총에서 나타난 소액주주들의 움직임을 보면 중장기적으로도 최 회장 측이 경영권을 유지할 것이란 분석이 나온다.
고려아연은 내년 정기 주총에서는 임기만료와 겹쳐 이사 12인, 분리선출 감사위원 1인을 선임해야 한다. 그런데 집중투표제 특성상 양측이 절반씩 이사회 의석을 나눠가질 가능성이 크고 '3%룰' 적용되는 감사위원 안건도 우호지분이 분산된 최 회장 측이 유리하다. 장재혁 메리츠증권 연구원은 양측의 지분 격차가 크게 줄어든 뒤 "최윤범 회장 측이 고려아연 이사회의 과반을 사실상 영구적으로 점유해 경영권 방어에 성공할 가능성이 높아졌다"고 내다봤다.
◆ 고려아연 경영권 분쟁의 향방은? 기업가치 올리기로 이동한다
이번 주총을 거치며 소액주주들의 표심도 최 회장 측에 우호하다는 점이 확인됐다는 평가가 나오는 만큼 앞으로 고려아연 안팎의 핵심 의제는 치열했던 경영권 분쟁에서 조금씩 실제 '사업전략 실행'으로 옮겨갈 것으로 예상된다.
양측의 지분 차이가 크지 않았음에도 이사 5인 선임 및 최 회장의 사내이사 선임 안건 등에서 모두 최 회장 측이 승리한 것은 소액주주들 선택의 영향인 것으로 보인다.
지난해 매출과 영업이익 모두 역대 최대 실적을 달성하고 대규모 투자를 통해 핵심광물을 중심으로 미래가치를 높이려는 현 경영진의 행보에 힘을 실은 셈이다.
향후 경영권 분쟁의 열쇠도 단순 표대결에서 실제 고려아연의 기업가치를 누가 키우느냐에 달려있다는 시선이 나온다.
양측의 다툼이 길어지면서 경영권 분쟁에서 오는 긍정적 효과는 사실상 사라졌고 이른바 '진짜 기업가치' 상승을 위한 논의와 그에 따른 선택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박세연 한화투자증권 연구원은 이번 고려아연 주총에 앞선 18일 경영권 분쟁을 놓고 "이 기간 주가 상승은 '지배구조 개선 프리미엄'이라기 보다는 양측의 공방 과정에서 만들어진 '분쟁 프리미엄'에 가깝다"며 "공개매수 가격 상향과 대규모 자사주 매입이 기업가치(밸류에이션) 상단을 끌어올렸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박 연구원은 "이번 주총은 양측의 대립구도보다 장기 경쟁력과 책임있는 의사결정을 실질적으로 담보할 수 있는 주체가 어디인지를 따지는 것이고 (이는) 의결권 행사의 기본이다"고 덧붙였다.
◆ '11조' 승부수 미국 통합제련소 건설이 가늠자
이번 주총에 앞서 최 회장 측의 우호지분 10%가량을 끌어내기도 한 대규모 고려아연의 미국 제련소 투자는 고려아연의 미래로 꼽힌다.
고려아연은 단일 제련소 기준 세계 최대 생산능력을 갖춘 울산 온산제련소 모델을 기반으로 보유한 기술, 공정, 제어시스템을 활용해 미국 테네시주 클락스빌에 65만㎡ 규모의 통합제련소를 조성한다는 계획을 세우고 있다. 올해 부지 조성 및 기반 공사, 설계·조달·시공(EPC) 업체 선정, 주요 장비 발주를 거쳐 2027년 착공, 2029년 완공을 목표로 이 사업을 진행한다.
고려아연은 미국 제련소 사업을 위해 미국 전쟁부(40.1%)를 최대주주로 고려아연(9.9%) 등이손잡은 크루서블JV(합작회사)를 설립했다. 크루서블JV는 고려아연의 제3자 배정 유상증자에 참여해 최 회장 측 우호세력으로 고려아연 지분 10.59%를 보유했다.
현재 미국은 전기자동차, 배터리, 인공지능(AI) 등 첨단산업의 성장으로 아연, 연, 구리 등 기초금속을 넘어 안티모니, 인듐, 갈륨 등 전략광물 수요가 빠르게 증가하고 있다.
최 회장은 글로벌 광물 공급망 영향력이 재편되는 과정에서 제련소를 통해 미국과 한국의 경제안보에 기여하는 한편 고려아연의 중장기 성장동력도 확보하겠다는 청사진을 그리고 있다.
고려아연은 지난해 연결기준 매출 16조5812억 원, 영업이익 1조2324억 원을 기록했다. 이는 광물·귀금속 분야의 회수율(회수 공정 중 원료로부터 실제 회수된 금속의 양을 비율로 나타낸 값) 증대를 토대로 제품 수요 증가 및 가격 상승에 효과적으로 대응하면서 거둔 역대 최대실적이다. 최 회장의 경영 행보에 힘이 실리는 셈이다.
최 회장의 주요 과제로는 재무건전성을 유지하면서 차질없이 미국 제련소 투자를 진행하는 것이 꼽힌다. 고려아연은 지난해 말 기준으로 부채비율 81.6%, 순차입금비율 11.7%이라는 상대적으로 양호한 재무지표를 나타내고 있지만 신규 투자가 모두 11조 원(74억 달러)에 이르고 다수의 이해관계자가 참여하는 대규모 프로젝트이기 때문이다.
이번 프로젝트에서 고려아연은 8600억 원을 직접 투자한다. 7조 원가량은 미국 정부와 JP모건이 차입해 조달하면서 고려아연이 연대보증을 선다. 나머지 2조8500억 원은 제3자 배정 유상증자를 통해 합작법인 크루서블JV에서 조달했다.
한국신용평가는 지난해 고려아연의 투자 발표 직후 "미국 현지에 제련소를 확보하면서 글로벌 1위 비철금속 제련 사업자로서 시장지위 등 중장기 사업경쟁력 및 수익성이 개선될 것"이라며 "다만 신규 제련소 건설에 따른 재무부담 확대도 불가피하다"고 바라봤다.
최 회장은 "현지 통합제련소 건설을 계기로 미국 항공우주, 방위산업에 필요한 필수적 핵심광물을 공급하는 전략적 파트너로 입지를 공고히할 것"이라며 "한미 경제안보 협력을 한층 강화하는 모범사례가 될 수 있도록 하겠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