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많이 생각하고 고민했던 주제였다. 산에 오를 때는 가장 빠르고 치열한 길로 단숨에 정상에 오르고, 내려올 때는 바람도 느끼고 풍경도 보며 천천히 유람하듯 걸어 내려오고 싶었다. 더 빨리, 더 높이. 무릎이 깨지고 엎어져도 다시 일어나며, 발끝만 보며 걸음을 옮겼다. 경치를 볼 여유는 없었다.
무릎이 깨지고 엎어져도 다시 일어나며, 발끝만 보며 걸음을 옮겼다. 경치를 볼 여유는 없었다. ⓒ허프포스트코리아
그러나 내려올 때만큼은 서두르고 싶지 않았다. 천천히, 우아하게…. 내려오는 것은 순리이니, 욕심내지 않고, 더 머물려 하지 않으며 쉬엄쉬엄 내려오고 싶었다.
시절과 회사를 잘 만나서 30대 중반에 임원이 됐다. 여성 임원 자체가 드물던 시절, 잘하고 싶었고 잘해야만 했다. 10년 넘는 시간 동안 쉼 없이 달렸고, 올라가기 위해 늘 애썼다.
임원이 되는 것보다 대표가 되는 것은 더 어려웠다. 역량만으로 되지 않았다. 운칠기삼의 '운'에 해당하는 타이밍과 조직의 문화, 회사의 상황 등 여러 조건이 맞아야만 가능했다. 몇 번의 미끄러짐과 실패 후에 생각지도 않은 업에서 첫 대표를 하게 됐고, 10년 동안 여러 회사의 대표를 지내면서 이제야 산 정상에 올라왔다고 말할 수 있었다.
언제나 올라가는 것보다 내려가는 것이 어렵다. 그렇기에 언제 어떻게 내려올지 늘 생각했다. 많은 사람들이 내려갈 준비 없이 정상에 오래 머무를 수 있다고 착각한다. 자리에 연연하게 되고, 실수를 두려워하며, 시도를 꺼린다. 후계자를 키우지 않고, 자신에 대한 도전을 불쾌해 한다. '큰 잘못만 안하면 된다'는 수동적 자세가 된다. 주변에 많이 보이는 리더의 모습이다.
또 어떤 이들은 이미 충분히 오른 후에도 더 오르려 한다. 무리한 도전을 계속하고, 여전히 인정받기를 바란다. '이만하면 됐다'는 자족이 없다.
그러나 자신의 목표를 어느 정도 달성했을 때 멋지게 퇴장하는 상상도 해두어야 한다. 비굴하지 않고 떳떳하게, 억울해하지 않고 쿨하게, 연연해하지 않고 미련 없이, 더 증명하려 하지 말고 현재에 만족하며, 습관적이고 무용한 도전을 또 하지 말고 있는 자리에서 열매를 맺으며, 우아하게 말이다. 기왕이면 천천히였으면 좋겠다. 사회에서 배우고 익힌 것 중에 내가 잘하고 사랑하는 일을 찾아서 인생의 다음 장을 내내 준비하면서 말이다.
어느 날 갑자기 산 중턱이나 아래까지 내려와 멘붕에 빠지는 경우도 있다. 회사의 직함과 포지션은 결국 사라지는 신기루 같은 것이다. '그 후'의 인생을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준비가 내려오는 과정에서 꼭 필요하다. 직장이 아닌, 평생 할 수 있는 '직업'을 찾아야 하고, 그건 지금까지의 삶 어딘가에 반드시 숨겨져 있다. 그러려면 속도를 늦추고 여유를 가져야 한다. 여유가 있어야 보인다.
큰맘 먹고 한라산 정상을 오른 적이 있다. 성판악 코스로 9시간을 등반했고, 그래도 오를 땐 꽤 괜찮았다. 내려오는 길에 문제가 생겼다. 올라간 스스로가 기특해서 조심하지 않고 들뜬 마음에 뛰듯 내려왔더니 오른쪽 무릎이 접히지 않았다. 마지막 1km는 동행에게 업혀서 내려왔다. 같은 상황에 처한 어떤 남성은 혼자서 다리를 질질 끌며 내려오고 있었다. 도와드리고 싶었지만 나도 여유가 없었다. 입구를 통과했을 때의 안도감이란….
거짓말처럼 무릎은 마치 다시 접혔다. 그때 알았다. 도움을 청할 수 있는 동행이 있으면 훨씬 수월하게 내려올 수 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어떤 힘듦이 있었을지라도 다 내려오면 고통이 사라진다. 동지와 함께 내려오는, 끝이 있는 여정, 생각만 해도 힘이 불끈 난다.
결국 올라가는 길만큼이나 내려오는 길도 중요하다. 어떻게 올라왔느냐만큼 어떻게 내려오느냐도 중요하다. 해볼 것 다 해보고 이루고 싶은 것 다 이루고, 우아하고 멋지게 아웃하는 것이 내겐 늘 아주아주 중요한 꿈이었다.
글쓴이 조정열 전 에이블씨엔씨 대표이사는 K옥션, 갤러리현대, 쏘카, 한독, 에이블씨엔씨에 이르기까지 10년 넘게 예술, IT 플랫폼, 제약, 소비재 산업을 넘나들며 전문 경영인으로 일했다. 1991년 동서리서치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한 이후 '마케팅 사관학교' 유니레버와 로레알 한국 지사에서 마케팅과 브랜딩을 담당하며 10년을 보냈다. 이후 MSD 한국 지사 사업부 담당, 피자헛 한국 지사 마케팅 담당으로 일하며 대표가 되기 전 10년간 임원 생활을 했다. 현재는 후배 경영인과 직장인의 멘토로, 예술계와 비즈니스를 연결하는 아트 프로모터로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 <전략보다 '지금, 여기'였다>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