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명 대통령이 초대 기획예산처 장관 후보자로 보수 진영의 대표적 경제통인 이혜훈 전 국민의힘 의원을 지명하면서 정치권이 술렁이고 있다. 이번 이 대통령의 인사는 그동안 강조해 온 ‘중도 실용’ 인사 원칙을 다시 한 번 입증한데 이어 내년 6월 지방선거를 앞두고 중도보수층까지 외연을 넓히겠다는 포석으로 풀이된다.
초대 기획예산처 장관 후보자로 지명된 이혜훈 전 국민의힘 의원이 29일 오전 서울 중구 예금보험공사에 마련된 인사청문회 준비 사무실로 첫 출근하고 있다. ⓒ뉴스1
이에 국민의힘은 ‘최악의 해당행위’라며 이 후보자를 즉각 제명했고, 진보진영 내부에서도 정체성 혼란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터져 나오고 있다. 이 대통령의 ‘이혜훈 발탁’이 신의 한 수가 될지, 아니면 아군과 적군 모두에게 환영받지 못하는 ‘악수’가 될지는 더 지켜봐야 할 듯하다.
29일 정치권 움직임을 종합하면 이재명 대통령의 이혜훈 기획예산처 장관 후보자 지명을 두고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힘을 비롯한 정당들의 반응이 뜨겁다. 청와대과 더불어민주당 지도부는 KDI(한국개발연구원) 출신이자 보수정당에서 3선을 지낸 이 후보자의 발탁이 능력과 전문성을 중시한 ’통합형 인사‘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김현정 민주당 원내대변인은 이날 국회 소통관에서 열린 언론 브리핑에서 “이 후보자는 서울대 경제학과와 미국 UCLA 경제학 박사를 거쳐 한국개발연구원 연구위원을 지낸 정통 경제학자 출신”이라며 “국가 예산을 기획·편성·총괄·관리하는 요직에 국민의힘 출신 전직 의원인 이 후보자를 지명한 것은 출신과 이념을 넘어 ‘오직 민생과 경제’를 위해 적재적소의 인재를 기용하겠다는 대통령의 ‘실용주의’와 ‘탕평’ 의지가 반영된 결과”라고 말했다.
반면 국민의힘은 이 대통령의 이번 인사를 ‘야권 분열을 노린 야비한 술책’으로 규정하며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국민의힘은 전날 이 후보자 지명이 발표된 직후 긴급 최고위원회를 열어 현직 당협위원장 신분인 이 후보자를 전격 제명했다.
국민의힘이 거센 반발을 하는 배경에는 이 후보자가 유승민 전 의원과 함께 보수진영에서 경제 전문가로서 ‘온건하고 합리적인 중도 보수’를 대표하는 인사이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지방선거를 앞두고 국민의힘 내부의 온건 보수 성향 인사까지 이재명 정부가 포용하는 모양새를 갖추면서 국민의힘을 극우 정당의 이미지가 더욱 짙어질 수 있다.
그러나 국민의힘이 이 후보자를 즉각 제명하고 정치적 배신자로 낙인찍는 움직임이 스스로를 더욱 극우 편향적으로 몰고가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대통령은 보수진영 인사에게 ‘통합의 손길’을 내밀었는데 보수정당이 대통령의 손실을 뿌리치는 모양새가 됐기 때문이다.
박원석 전 정의당 의원은 CBS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에서 “양쪽이 하는 행위를 국민적 눈높이에서 볼 때 국민들이 어떤 행위를 선호하겠나, 국민의힘 같이 저런 행위를 선호할까? 아니면 저렇게 진영이 다름에도 불구하고 과감한 기회를 주고 과감한 발탁을 해서 국정에 필요한 일이라면 기용하겠다는 걸 더 바람직한 정치로 보겠나”라고 짚었다.
박 전 의원은 이어 “이게 계획된 건지 모르겠지만 제가 보기에는 정치적으로 매우 의미 있는 행보라 보고 이런 인사가 고착되면 국민의힘은 갈수록 쪼그라드는 것이고 민주당은 갈수록 넓혀서 저 전략이 성공하면 경쟁적 양당제가 아닌 범중도 보수 거대 정당이 탄생하고 하나는 극우로 밀려나는 것”이라고 바라봤다.
이준석 개혁신당 대표도 이날 최고위원회의에서 이 후보자 지명과 관련해 “이 후보자를 배신자로 몰아세울 때가 아니다”라며 “보수진영은 그동안 내부 동질성 강화만 외쳐 왔고 이제 더는 외연 확장이 불가능해졌다. 보수는 닫혀 가고 더불어민주당은 열려 가고 있다”고 위기감을 나타냈다.
그러나 이 대통령의 이 후보자 지명에 대한 범진보 진영 내부의 시선도 곱지 않다는 게 현실이다. 이 후보자가 과거 윤석열 전 대통령 탄핵 반대 집회에 참여했던 전력이 있는 데다 이재명 정부의 경제정책 기조인 ‘확장재정’을 ‘포퓰리즘’이라며 강하게 비판해 왔기 때문이다.
이 후보자는 지난해 2월 JTBC 유튜브 '장르만 여의도'에서 “재정 지출을 늘린다고 경제 활성화로 그대로 가지 않는다는 연구가 많다”며 “세금을 걷어가서 국가가 지출하게 되면 누수와 비효율 때문에 오히려 경기 활성화에 안 좋고 똑같은 1을 썼을 때 정부가 가져가서 쓰는 것보다 민간이 쓰게 내버려두는 게 훨씬 효과적”이라고 강조했다.
이언주 민주당 의원은 전날인 28일 페이스북에서 “계엄에 찬동한 이들까지 통합의 대상인가”라며 불만을 표시했다. 윤준병 민주당 의원도 같은 날 페이스북에서 “정부 곳간 열쇠를 맡기는 것은 포용이 아니라 국정 원칙의 파기”라며 공개적으로 반발했다. 진보당과 사회민주당, 기본소득당은 이 대통령에게 이 후보자 지명 철회를 요구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여기에 기획예산처를 분리시킨 이유가 노무현 정부 당시 정부 부처별 예산편성권을 높여주기 위해 도입했으나 제대로 실현되지 않은 총액예산자율편성 제도를 강화하기 위해서인데 보수적 경제관을 가진 이 후보자가 이러한 이재명 정부의 국정철학에 함께 할 수 있는 인사인지 면밀히 평가해야 한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실제 이 후보자는 이날 서울 중구 예금보험공사에 마련된 인사청문회 사무실로의 출근길에서 “기획예산처는 전략·기획의 컨트롤타워로서 미래를 향한 걸음을 내딛는 부처”라고 말해 기획예산처가 경제정책의 장기적 청사진을 마련하는 등 강력한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는 뜻을 나타냈다.
민주당 지지층이 많이 모이는 인터넷 커뮤니티에서도 이번 이 후보자 발탁을 두고 ‘정체성을 버린 무리한 우클릭’이라는 우려와 ‘선거 승리를 위한 전략적 유연성’이라는 옹호론이 팽팽히 맞서고 있다.
정치권 안팎의 반응을 고려할 때 이 후보자 인사청문회는 뜨겁게 달궈질 것으로 전망된다. 국민의힘은 ‘배신자 프레임’으로 송곳 검증을 예고했고, 여권과 범진보 진영도 이 후보자의 경제 철학이 이재명 정부의 확장 재정 기조와 충돌한다는 점을 집중적으로 파고들 것으로 관측된다.
범여권 정당 소속 한 의원은 허프포스트와 나눈 통화에서 “실용정부를 표방하는 이재명 정부에서 인재를 널리 쓴다는 차원에서 내정한 것은 이해되는 측면이 있다”면서도 “다만 이 후보자의 확장재정 정책에 대한 입장은 무엇인지, 기획과 예산 분리·독립에 대한 철학은 무엇인지 철저하게 검증해야 되지 않나 생각한다”고 말했다.
결국 이 대통령의 ‘이혜훈 카드’가 중도층의 마음을 얻어 지방선거 압승의 발판이 될지, 아니면 아군과 적군 모두에게 환영받지 못한 채 국정 동력을 약화시키는 악수가 될지는 인사청문회 과정과 향후 이 후보자의 행보에 달려있다는 시선이 나온다.
박수현 민주당 수석대변인은 이날 KBS라디오 전격시사에서 “민주당도 대통령의 지명 인사라고 단순하게 옹호만 하는 것이 아니라 국민과 함께 더 날카롭게 검증하겠다는 원칙으로 청문회에 임해야 된다”며 “이재명 정부의 국정 기조, 국민적 정서에 부합할 수 있다는 것들을 충분하게 검증해야 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