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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희경. ⓒ한겨레/KBS
양희경. ⓒ한겨레/KBS

지난 10일 경기도 용인에 있는 독립서점 ‘생각을 담는 집’에 여성 30여명이 모였다. 배우 양희경을 만나기 위해서다. 올해 우리 나이로 칠순, 배우 경력만 42년(1981년 연극 <자 1122년>으로 데뷔). 이날 양희경이 팬들과 나눈 이야기는 뜻밖에 “힘들고 지칠 때” 한 ‘부엌일’에 관한 것이었다. 그는 ‘일’이 아니라 ‘놀이’라고 했다. “일이라고 생각하면 너무 가혹하고 우울해지잖아요.”

지난달 30일 서울 여의도  본관 뜰에서 카메라 앞에 선 배우 양희경씨. ⓒ한겨레 박미향 기자
지난달 30일 서울 여의도 본관 뜰에서 카메라 앞에 선 배우 양희경씨. ⓒ한겨레 박미향 기자

초등학교 4학년 때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 생계 수단이었던 어머니 윤순모 여사의 양장점은 불이 나 풍비박산됐다. 어머니가 잘못 선 빚보증까지 집안을 옥죄어왔다. 통기타 하나 메고 돈벌이에 나선 언니 양희은과 어머니를 대신해 그는 집안 살림을 도맡았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일이다. 부엌은 어린 양희경의 일터였다. 어른이 된 뒤에도 그는 일터를 떠나지 못했다. 두 아이를 홀로 키우면서 수많은 연극 무대와 드라마, 영화 촬영 현장을 누비느라 하루 24시간도 부족했다. 하지만 ‘부엌일’을 놓을 수 없었다. 함께하는 시간이 적은 아이들에게 기를 쓰고 밥을 해 먹이고 싶었기 때문이다. 마침내 그는 터득했다. “집밥을 먹으면 인생이 달라질 수 있다”는 생각에 이른 것. 엄마의 빈자리가 커 보였던 두 아들은 건강한 어른으로 성장했다. 아들은 훗날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항상 냉장고에 엄마가 해준 음식이 있어서 엄마가 집에 없어도 ‘나 여기 있다’ 하는 것 같았다”고.

양희경의 밥 이야기는 지난 4월 출간한 <그냥 밥 먹자는 말이 아니었을지도 몰라>에 오롯이 담겼다. 지난 10일 ‘생각을 담는 집’에서의 모임은 이 책의 북토크였다. 책에는 ‘요리를 배운 적 없는’, 어쩌다 배워도 ‘멋대로 하는’ 양희경식 ‘마구잡이 요리법’이 그의 삶과 잘 비벼져 있다. 지난달 30일 서울 여의도에서 양희경을 만나 그의 음식 철학과 배우로서의 삶을 들었다.

지난 4월 출간한  ⓒ출판사 달
지난 4월 출간한 ⓒ출판사 달

 

“사람 관계 핵심은 밥”

―배우로서 일가를 이룬 분이 집밥 책은 왜 내셨나요?

“아들과 손주, 며느리에게 나의 레시피를 남겨주고 싶었어요. 팬데믹이 터진 후에 산책과 매일 만든 요리 사진, 글을 에스엔에스에 올렸어요. 수많은 댓글이 달리고 ‘책을 내봐라, 글이 좋다’고 하는 이가 많았어요. 그래서 용기가 생겼죠. 매일 한 일, 만난 사람, 만든 음식, 길고양이나 개의 모습 등을 일지로 지금까지 쓰고 있어요. 치매 예방에 글쓰기와 요리가 1·2위를 다투잖아요. 저도 치매 환자가 될 수 있으니까요.(웃음)”

 

―주제가 밥 얘기고, 책에 소개된 조리법이 62개더라고요.

“본의 아니게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부엌에 들어갔죠. 된장찌개, 고추장찌개, 콩나물무침 뭐 그런 거 만들었어요. 고등학생이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겠어요. 재료를 조합해 만든 게 맛있으면 그 희열이 엄청났어요. 그런 날들이 쌓였는데, 어느 날 ‘아이들에게 나는 어떤 엄마로 기억될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부모님이 너무 일찍 이혼하셨으니까. 제가 8살 때죠. 아버지는 다른 분과 재혼하셨고. 저는 아버지와 살았기에 그때까지만 해도 엄마에 대한 기억이 별로 없었어요. 그런데 살면서 불현듯 엄마가 8살 전에 해준 음식이 생각나는 거예요. ‘밥을 꼭 해주는 엄마로 기억되자’ 한 것이죠.”

 

―가족 때문에 시작한 밥 짓기지만 음식 철학도 생겼을 거 같은데요. 고난도의 조리 테크닉을 구사하며 극강의 미식을 추구하는 셰프가 있는가 하면 음식은 허기와 끼니 채우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다고 얘기하는 대가들도 있잖아요.

“음식이 사람을 만든다고 생각해요. 좋은 음식을 먹고 피를 맑게 하면 병이 낫고, 좋은 소리만 들린다고 하잖아요. 세상에는 얼마나 많은 이론과 지식이 있나요. 그중에서 좋은 걸 골라 듣는다는 게 참 어려운 일이죠. 그래서 피가 맑아야 된다고 생각해요. 그러면 머리가 맑아지고, 머리가 맑아야만 좋은 것을 보고 듣게 되죠. 피를 맑게 하려면 음식이 중요합니다. 따지고 보면 (사는 건) 먹는 게 다 아니겠어요. 사람 관계의 핵심은 밥이죠. 요즘 청소년들이 껴안은 수많은 문제도 아버지든 어머니든 그 누구든 해주는 집밥이 있으면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고 봐요.”

 

―먹는 게 중요하다고 하셨는데 그러면 잘 먹는 것은 무엇일까요?

“뭔가를 많이 가미해서 (음식이) ‘복잡해지는 것’을 싫어해요. 재료가 좋으면 그렇게 할 필요가 없어요. 재료 본연의 맛을 잘 살린 음식이 맛있고, 맛있는 걸 먹는 게 ‘잘 먹는 것’이죠. 저는 재료 본연의 맛을 잘 살리는 데 집 간장, 집 된장만 써요. 재료 맛은 죽이고 양념 맛만 남는 것과 달라요.”

그는 장을 직접 담그는 우리 간장 예찬론자다. ‘양희경표’ 음식의 깊은 풍미는 간장에서 나온다. 오죽하면 서양 요리사들이 들으면 기함할 소리를 할까. “서양 요리에도 우리 간장을 넣고 끓이면 맛이 좋아진다. 못 믿겠으면 러시안 수프나 토마토스튜에 꼭 넣어보라”고 책에 적었다. 조리법도 단순한 게 좋다는 게 그의 지론. 싱싱한 제철 재료를 단순한 조리법을 활용해 집 간장으로 맛을 내는 것, 이게 ‘양희경표’ 음식의 뼈대다.

“장 담그는 게 번거롭다고 생각할 수 있죠. 유기농 콩으로 만든 메주 파는 이들 있어요. 사서 소금 풀어 담가두면 간장이 되고, 된장이 되죠.” 그는 장의 재료가 되는 소금을 가장 까다롭게 고른다고 말한다. 천일염을 1000도에서 끓여 만든 소금을 쓴다. 500g에 소비자가격이 대략 2만~4만원. 고가다. “우리가 소금을 먹어봐야 얼마나 먹겠어요. 저는 치장하는 데 돈을 안 쓰니, 이런 데 투자하렵니다.”


치매 어머니, 건강식으로 호전

―피를 맑게 한다는 좋은 음식은 뭔가요?

“좋은 음식은 자연에서 오죠. 자연농법이나 슈타이너농법(생명역동농법)으로 재배한 식재료로 만든 음식이죠. 풀과 함께하는, 노지농법이라고 할까요. 유기농 식재료나 자신의 텃밭에서 기른 재료가 좋아요.”
슈타이너농법은 1920년대 독일 출신 건축가이자 교육자인 루돌프 슈타이너(1861~1925)가 개발한 농법이다. 유기농법의 시초로 알려져 있는데 △거름과 퇴비 사용 △인공 비료, 살충제나 제초제 사용 배제 △지역 중심의 생산과 유통 등이 특징이다. 바이오다이내믹농법이라고도 한다. 별자리나 점성술을 활용한 파종을 권하기도 해서 사이비 과학이라는 평도 받았지만, 기후위기가 가속화하면서 최근 주목받고 있다.

 

―책에서 건강한 음식은 치매도 다스릴 수 있다고 했는데요.

“어머니가 94살인데 치매를 앓고 계세요. 86살일 때 어머니, 저, 언니, 조카 여성 3대가 일본 여행을 갔는데, 어머니가 역 앞에서 쓰러지셨어요. 일본 의사가 ‘(어머니) 심장에 문제가 있다’는 거예요. 어머니는 이미 당뇨·고혈압·고지혈증에다 경미한 치매를 앓고 계셨거든요. 심정지까지 왔으니 초상 치르는 줄 알았어요. 13일 만에 귀국했는데, 무염·무당·무유인 병원식이 어머니를 살렸어요. 귀국해서도 세끼를 병원식으로 드시게 했죠. 살코기는 일주일에 1~2번 정도, 사과 4분의 1, 딸기 세개 이상 못 드시게 했어요. 3개월 만에 모든 게 정상으로 돌아왔고 치매도 좋아졌다는 병원 소견을 들었죠. 음식으로 못 고치는 병은 없다는 말 있잖아요. 실감했죠. 하지만 언니는 저와 생각이 달랐어요. ‘사시면 얼마나 사신다고 드시고 싶은 거 드시게 하자’ 주의였어요. 그러다가 다시 안 좋아지셨죠. 저의 잔소리가 다시 시작됐는데, 쓰러져서 의식 없어지면 약도 없고, 자식들은 벌을 서야 하는 거라고 했죠. ‘엄마 곱고 예쁘게 죽고 싶냐? 인간답지 않게 똥오줌 (우리가) 받아내면서 살았는지 죽었는지도 모르게 지내고 싶냐’고 했죠. 그렇게 늘 공갈·협박을 하는데 안 통해요.(웃음)”

 

―‘양희경표 집밥’ 찾는 이가 많을 거 같아요. 집밥 파티 많이 하시나요?

“사람들 초대해서 집밥 해 먹이는 스타일이 아니에요. 요리는 나를 위해서, 가족을 위해서 합니다. 일이라면 어쩔 수 없지만 모르는 사람하고 밥 먹는 건 너무 어렵잖아요. 밥은 진짜 속을 터놓고 지내는 사람들끼리 먹는 거죠.”
―누구에게나 잊히지 않는 솔푸드 하나쯤 있잖아요.
“집에서 만드는 음식은 다 솔푸드죠. 하지만 꼽으라면 달걀떡볶이예요. 스크램블드에그에 떡 넣는 것과 비슷해요. 떡 익을 때 달걀 푼 물을 넣는 거예요. 토란국도 제 솔푸드죠.”

 

―당연히 맛집도 찾아다니시죠?

“안 다녀요. ‘호기심 천국’ 우리 언니와 반대죠. 비싼 돈 주고 먹어봐야 별로 좋을 것도 없더라고요. (오랫동안) 제가 검증한 몇군데만 다니는 편입니다.”
그의 단골 식당은 서울 마포의 ‘히말라야 어죽’, 상암의 ‘맛있는 밥상 차림’, 인사동의 ‘꽃, 밥에 피다’, 삼각지의 ‘카카오봄’, 딱 4곳이다.


‘애드리브 연기’가 싫은 이유

―배우로서 인생이 궁금합니다. 배우가 꿈이었나요?

“언니가 ‘너는 그쪽에 소질 있다’ 해서 하게 됐죠. 그런데 대학에 가서 밤 11시까지 연극 연습을 했는데, 그게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어요. 행복했어요.”

1995년 출연한 1인극 . ⓒ한겨레 자료사진
1995년 출연한 1인극 . ⓒ한겨레 자료사진

―80~90편의 드라마와 영화·뮤지컬·연극에 출연했는데, ‘국민 고모’란 별칭이 생겼을 정도로 역할이 제한적이었잖아요. 불만은 없으셨어요?

“프로 배우로서 활동을 시작한 뒤 10년을 돌싱·싱글·이모·고모 등의 ‘태풍의 눈’, 문제를 항상 갖고 있는 사람을 연기했죠. 지겨워서 못 살겠다 싶었어요. 그때 연극 <늙은 창녀의 노래>를 만났습니다. 인터넷이 없던 시절이라 전화로 예매해야 했는데 전화가 불통이 될 정도 인기였어요. 공연 시간이 저녁 7시인데, 오전 7시부터 줄을 서더라고요. 지방도 돌고 앙코르 공연도 했죠. 이 작품은 내가 완전히 틀을 깬 연극이었죠. 보통 예쁘고 몸매 좋은 배우가 해야 할 배역이라고 생각하는데, 저는 아니잖아요. 그게 사람들을 더 빠져들게 한 것 같아요. 어려움도 있었어요. 전라도 사투리가 잘 안돼서 괴로웠어요. ‘마음을 내려놓자’ 하니 말문이 터지더라고요. 뭐든 과하게 욕심내고 잘해보자 하면 안되는 거 같아요. 그 연극으로 ‘이제 똑같은 캐릭터를 죽을 때까지 해도 재미있게 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동안의 불만이) 해소된 거죠. 지금도 연극은 자주 출연하려고 해요. 뮤지컬도 새로운 즐거움이었어요. 드라마 <넝쿨째 굴러온 당신>(KBS)은 비중은 작았지만 평생 만나볼 수 없는 좋은 드라마였고, 연기하면서 너무 행복했어요.”

 

2012년 드라마. ⓒKBS
2012년 드라마. ⓒKBS


<늙은 창녀의 노래>는 송기원의 소설을 연극화한 작품이다. 대본까지 쓴 송기원이 전국의 뒷골목 인생을 취재하다가 전남 목포에서 직접 겪은 일을 극화했다. 그곳에서 그는 ‘늙은 창녀’를 만나 그의 애잔하면서 굴곡진 삶을 들었다. 1995년 초연한 이 작품에서 양희경은 1인극의 진수를 보며 주며 화제의 주인공이 됐다. 당시 그의 나이 42살.

 

―요즘 나이 든 여성 배우의 설 자리가 점점 줄어드는 것 같아요.

“65살을 기점으로 출연 요청이 확 줄었어요. 생각했죠. ‘이렇게 배우를 끝낼 수도 있겠구나’라고 말이죠. 그렇다면 나는 뭔가 다른 일을 하면서 살아보자, 내가 즐기면서 할 수 있는 일을 찾자, 그래서 요리에 더 집중하게 됐어요.

 

―부침이 심한 엔터테인먼트 세계에서 잊히는 게 괴로운 후배 여성 배우에게 해주고 싶은 말은요?

“당연히 트라우마가 생기죠. 괴롭죠. 하지만 누구나 당연히 잊히죠. 세상 모든 배우는 잊힙니다. 이건 순리예요. 그래서 언제든지 제2의 인생을 살 준비를 하라고 말해주고 싶어요. 그게 돈, 인기, 명예와 연결되지 않을 수 있지만, 내가 나를 위해서 준비하는 거잖아요. 전 연기 말고 제일 좋아하는 요리를 선택했어요.”

 

―수많은 작품에 출연하면서 꼭 지킨 나만의 철칙이 있나요?

“연기자는 작가의 정신이 녹아 있는 대사를 가장 정확하게 말해줘야 한다고 생각해요. 전 한 글자도 안 틀리려고 해요. 대사가 좀 어색하더라도 ‘작가의 의도가 있겠지’ 하고 그냥 그대로 해요. 그래서 저는 애드리브 하는 사람을 제일 싫어합니다. ‘그러면 네가 써! 그럼 네가 쓰지 왜 남이 쓴 거를 대신한다고 하느냐’ 그런 생각이 제겐 있거든요.(웃음)”

 

1995~1996년 방영된 드라마. ⓒKBS
1995~1996년 방영된 드라마. ⓒKBS


―마지막으로 앞으로 계획은 뭔가요?

“(단호하게) 없어요. 평생 계획을 세워본 적이 없어요. 한번도 계획대로 된 적도 없고요. 주어진 일에 200%, 300% 최선을 다할 뿐이에요. 우리가 계획한다고 될 리도 없고, 어떤 일이 나한테 올지도 모르는데 계획을 장황하게 세워서 뭐 해요. 아, 한가지가 있네요. 칠순 잔치 떡 대신 이 책을 돌리는 거예요.”

양희경은 잡채를 좋아한다. 온갖 재료가 어우러지는 게 좋단다. 다른 재료들이 만나 또 다른 맛을 내는 잡채는 ‘장담컨대 인생’이라고 단언한다. 우리 안에 여러 재료, 인생의 국면마다 도착하는 재료들을 잘 버무려 삶을 맛난 ‘잡채’로 만드는 것은 우리의 몫. 그의 밥 이야기에 더 솔깃해지는 이유다.

한겨레 박미향 기자 m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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