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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 바람이 불고 졸업과 입학 시즌이 다가오면 변호사의 전화기도 덩달아 바빠집니다. 바로 대한민국 가구의 상당수가 움직이는 본격적인 '이사철'이기 때문입니다. 정들었던 집을 떠나 새로운 보금자리로 옮긴다는 설렘도 잠시, 많은 세입자의 피를 말리는 집주인의 한마디가 들려오는 시기이기도 합니다. 

집주인이 보증금을 돌려주기 전까지는 열쇠를 반환해서는 안 된다. 사진은 이해를 돕기 위해 AI로 생성한 이미지를 재편집한 것. ⓒ 허프포스트코리아
집주인이 보증금을 돌려주기 전까지는 열쇠를 반환해서는 안 된다. 사진은 이해를 돕기 위해 AI로 생성한 이미지를 재편집한 것. ⓒ 허프포스트코리아

"지금 당장은 돈이 없는데... 다음 세입자 들어오면 바로 줄테니, 일단 짐부터 빼줘요." 

이 말을 들은 세입자는 그야말로 패닉에 빠집니다. 새로 이사 갈 집의 잔금 날짜는 코앞으로 다가왔고, 이삿짐센터 예약도 다 해뒀는데 수억 원의 돈이 묶여버린 겁니다. 집주인은 "짐을 빼고 비밀번호를 알려줘야 방을 보여주고, 그래야 빨리 돈을 받아서 보내줄 것 아니냐"며 회유하거나, "서로 믿고 가자"며 읍소하기도 합니다. 

마음 약한 세입자들은 '설마 떼먹겠어?' 하는 마음에, 혹은 당장 이사를 가야 하니 울며 겨자 먹기로 짐을 뺍니다. 그리고 현관문 비밀번호를 집주인에게 넘겨줍니다. 
 
그러나 이러한 집주인의 제안은 결코 받아들여서는 안 됩니다. 그 순간, 임대차보증금은 법의 보호 울타리 밖으로 밀려나기 때문입니다. 

현관문 비밀번호를 알려주는 것은 단순한 의미가 아닙니다. 

짐을 빼고 비밀번호를 넘겨주는 것을 그토록 말리는 이유는 바로 주택임대차보호법이 정한 '대항력(對抗力)' 때문입니다. 대항력이란 쉽게 말해 집주인이 바뀌거나 집이 경매로 넘어가더라도 "내 보증금 돌려주기 전까진 못 나가!"라고 버틸 수 있는 힘입니다. 특히 집이 경매로 넘어갔을 때 내 보증금을 우선적으로 돌려받을 수 있는 '우선변제권'의 핵심 전제 조건이기도 합니다. 

이 힘을 유지하려면 두 가지 조건이 필수입니다.  

첫째는 동사무소에 전입신고를 하는 것, 둘째는 그 집에 실제로 살면서 '점유(占有)'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집주인의 말만 믿고 짐을 몽땅 뺀 뒤, 현관문 비밀번호까지 알려줬다면 법적으로 어떻게 될까요? 그렇게 되면 더 이상 그 집에 사는 사람이 아니게 됩니다. 즉, '점유'를 상실하게 되어 그토록 중요한 '대항력'이 즉시 사라집니다. 

대항력이 사라지면 '보증금을 1순위로 돌려받을 든든한 세입자'가 아니라, 돈 떼일 위기에 처한 수많은 사람 중 한 명인 '일반 채권자'로 전락합니다. 만약 그 사이에 집주인이 그 집을 담보로 대출을 받거나, 다른 채권자에 의해 집이 경매로 넘어가면? 안타깝게도 내 돈을 지킬 방법은 사실상 사라집니다. 

이사는 가야 하는데 돈은 안 준다면? ‘임차권등기명령’으로 

“당장 내일모레 새집으로 이사 가야 해요. 직장도 옮겼고 아이 학교도 전학시켜야 하는데 어떡합니까?" 

이런 진퇴양난의 상황을 위해 존재하는 제도가 바로 '임차권등기명령'입니다. 이름이 조금 길고 어렵지만, 원리는 간단합니다. 등기부등본이라는 공식 장부에 "여기에 내 보증금이 묶여 있다"는 사실을 기록해두는 것입니다 

관할 법원에 임차권등기명령을 신청하면, 약 2주 정도 뒤에 등기부등본에 임차권이 기재됩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점은 반드시 등기부등본에 내 이름이 올라간 것을 눈으로 확인한 후에 이사를 가야 한다는 점입니다. 신청만 해두고 이사를 가면 의미가 없어집니다. 

이렇게 등기가 완료되면, 짐을 빼고 주소를 다른 곳으로 옮겨도 기존에 가지고 있던 '대항력'과 '우선변제권(순위)'이 그대로 유지됩니다. 쉽게 말해, 몸은 떠나지만 내 권리는 그 집에 '알박기'를 해두고 가는 셈입니다. 게다가 이렇게 등기가 되면 집주인은 다음 세입자를 구하기가 매우 어려워지기 때문에(등기부에 '보증금 못 돌려준 집'이라는 빨간 줄이 그어진 셈이니까요), 십중팔구는 어떻게든 돈을 마련해서 연락이 옵니다. 

"돈이 입금되는 소리를 듣기 전까진, 문을 열어주지 않으셔도 됩니다" 

법적으로 "보증금 반환"과 "집 비워주기(비밀번호 인도)"는 동시에 이루어져야 합니다. 집주인이 "부동산에서 지금 송금하러 갔으니 일단 비번 좀 알려줘, 이삿짐 들어와야 하잖아"라고 해도 절대 흔들리지 마세요. "짐이 빠져야 다음 세입자가 돈을 넣지!"라고 화를 내도 마찬가지입니다. 

짐을 다 빼고 청소까지 마쳤더라도, 현관문은 잠그고 키(비밀번호)는 주머니에 넣고 기다리세요. 집 상태를 확인시켜 줄 때도 문만 열어주고 비번은 공유하지 않는 것이 원칙입니다. 스마트폰 뱅킹 앱에서 '입금 완료' 알림이 울리는 것을 눈으로 확인한 그 순간, 비밀번호를 문자로 보내주시면 됩니다. 

이러한 행동은 야박한 게 아니라, 귀중한 보증금을 지키는 가장 확실하고 정당한 법적인 보호방법입니다. 새로운 보금자리는 언제나 설레는 법입니다. 부디 이 글이 여러분의 소중한 전세금을 지키는 튼튼한 자물쇠가 되어, 마음 졸이는 일 없이 기분 좋은 '이사 가는 날'이 되기를 진심으로 응원합니다. 

글쓴이 김승현 변호사는 법무법인 선인 파트너 변호사다. 한양대학교에서 법학을 전공했다. 거제시에서 행정법률 자문 공무원으로 일하기도 했으며, 다양한 소송 현장을 누비며 법적 문제를 해결해 왔다. ‘승변’은 의뢰인의 승소를 위해 열심히 뛰겠다는 뜻에서 그의 이름 가운데 글자를 따서 지은 것이라고 한다. 복잡한 법전 속에 갇힌 법률 상식이 아니라, 당장 내 삶을 지켜주는 유용한 생활 법률 이야기를 들려주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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