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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순삭이 대세인데.." 왓챠 오리지널 '오늘은 좀 매울지도 몰라'는 띄엄띄엄 길~게 늘여서 봐야 제대로 꿀맛이다

한석규·김서형 부부 연기가 찰떡이다.

오늘 메뉴는? ⓒ왓챠

바야흐로 시간순삭 콘텐츠의 시대다. ‘하나만 보려고 했는데 이틀 밤새워서 몰아봤다’가 곧 최고의 찬사가 되는 시대. 그런데 믿겠는가. 천천히 뜸 들여 보아야 더 맛깔나는 작품이 있다면. 폭풍처럼 몰아치는 마라맛 작품들이 범람하는 시대, 불쑥 튀어나온 그 이름도 비범한 드라마 <오늘은 좀 매울지도 몰라>(이하 <오늘은>)에는 제목 못지않게 독특한 지점이 있으니 바로 유유자적 느긋한 호흡이다. 다음 화로 넘기지 않으면 배길 수 없게 하는 후킹한 결말도 시간이 어떻게 가는지 모르게 하는 압도적 몰입감도 없이 은밀하게 스며드는 <오늘은>. 다음화의 내용은 궁금하지만 이미 알려진 결말에 마주할 자신이 없어 리모콘의 붉은 정지 버튼을 만지작거린다. 왓챠 오리지널 <오늘은>은 강창래 작가가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쓴 동명의 에세이를 원작으로 한다. 췌장암 4기로 시한부 판정을 받은 출판사 대표 다정(김서형)과 별거 중이던 남편 창욱(한석규)의 재결합, 그리고 보살핌을 그린 12부작 드라마다.

 

‘몰아보기’ 대신 ‘띄엄띄엄’ 봐야 더 재밌다?

대세는 몰아보기. 넷플릭스를 필두로 한 OTT 드라마 다수는 몰아보기 가능한 형태로 ‘전 회차 동시 공개’(<오징어 게임>) 혹은 ‘파트제 공개’(<더 글로리>)를 선택하는 추세다. 또 지난해 공개된 <재벌집 막내아들>은 주3회 방영으로 비슷한 길이의 TV 드라마들보다 1.5배 빠른 종영을 맞았다. 반면 <오늘은>은 매주 2회차씩 총 6주에 걸쳐 12회를 공개하는 전통 TV 드라마의 방식으로 시청자들과 만났다. 왓챠 오리지널 드라마의 특성으로도 볼 수 있겠지만, 이처럼 상대적으로 느긋한 공개 방식은 <오늘은>의 이야기, 그리고 주제와 어우러져 독특한 시너지를 만들어낸다.

조금만 더. ⓒ왓챠

러닝타임 6시간짜리 작품을 6주에 걸쳐 보여주는 <오늘은>의 공개 방식은 단축보다는 지연, 종결보다는 지속에 기울어있다. 이러한 공개 방식은 두 가지를 뒤로 미룬다. 하나는 이야기의 끝, 드라마의 완결이며 다른 하나는 다정의 죽음이다. 만약 12회차가 단번에 ‘풀렸다’면 우리는 다정의 죽음을 6시간 만에 볼 수 있으며 그렇기에 보고야 말 것이다. 하지만 주에 2회씩만 감질나게 주어진다면. 우리는 혹 원한다 해도 다정의 죽음을 6주보다 일찍 맞이할 수 없다. 필요하다면 얼마든 미룰 수야 있다. 이 힐링 요리 드라마는 반항적이다. 뚝심이 있다. ‘빨리 다음 화 주세요, 현기증 난단 말이에요’ 외침이 난무하는 사이로 묵묵히 매주 30분짜리 에피소드를 2편씩 건네주며 말한다. ‘아껴 먹어!’ 그리고 이 뚝심은 방영 스타일뿐 아니라 이야기 내부에서도 발견된다. 

 

인물도 스토리도 삼삼한데, 훅 들어오는 매운맛 정체는?

<오늘은>은 유별나게 독특한 이야기가 아니다. 오히려 단순한 편이다. <오늘은>은 ‘다정의 암 선고-별거하던 부부/가족의 재결합-병세의 악화-다정의 죽음-새로운 시작’이라는 선형적 흐름을 충직하게 따라간다. 인물들의 성격도 마찬가지다. 고집은 좀 세지만 기본적으로 교양 있고 젠틀한 다정-창욱 부부, 잠깐 반항하나 싶더니 이내 순한 아들 포지션으로 수렴하는 재호(진호은), 이 이상 친절할 수 없는 마트 직원 수원(양경원)과 믿음직한 출판사 직원들까지. <오늘은>의 구성 요소는 힐링 드라마임을 감안하더라도 삼삼하고 정갈하다. 창욱이 암 환자인 다정을 위해 만드는 음식처럼 기름기도 소금기도 없다. 그러면 이쯤에서 의아할 수 있다. 그런데 왜 제목이 <오늘은 좀 매울지도 몰라>인 거냐고. 매운맛 대체 어딨냐고. 있다, 매운맛. 1화 '잡채의 눈물'에서 창욱이 첫 잡채 요리에 무려 3개(!)나 집어넣은 태국산 쥐똥고추처럼, 작지만 강한 한 방이 이 드라마에는 도사리고 있다.

이거 몇 개 넣은 거야..? ⓒ왓챠
이거 몇 개 넣은 거야..? ⓒ왓챠

잠시 쥐똥고추를 먹어보지 않은 이들을 위해 간단히 설명한다. 쥐똥고추는 고추장처럼 붉다. 청양고추의 반의반도 안 되는 크기면서 세 배 이상 맵다. 음식을 먹다가 실수로 씹기라도 하면 그 끼니는 거의 끝났다고 봐도 좋다. 물을 세 컵 들이켜도 혀가 얼얼하고 침이 무한 생성되니까. 겨우 불길을 잡고 나면 먹은 음식의 맛은 기억도 나지 않는다. 다만 다시는 쥐똥고추 들어간 음식은 먹지 않겠다 다짐할 뿐. 그러나 어느 느끼한 음식을 먹을 날에는 문득 이 쥐똥고추의 맛이 그리워지기도 하니, 그야말로 “작은 고추가 맵다.”

<오늘은>의 곳곳에는 자꾸만 생각나는 이 쥐똥고추의 조각들이 뿌려져 있다. 바로 ‘글’이다. 다른 말로는 기록이며 더 깊이 들어가면 기억이다. 순간을 영원히 살리고자 하는 마음. 그것은 작중 창욱이 자신의 블로그에 매일 기록하는 ‘요리 레시피’로 나타난다. 창욱은 읊조린다. “평생 글을 써왔지만 내 삶의 한 부분을 이렇게 영원히 살려두고 싶었던 적이 없다.” 창욱이 만든 요리 레시피는 직접 찍은 사진과 함께 블로그에 차곡차곡 쌓인다. 그는 “내가 쓰는 레시피는 누군가 따라할 수 있기를 바라는 게 아니”라지만, 어떤 이는 “이상하게 읽다 보면 가슴이 먹먹해”진다고 말한다.

맛이 살려낸 기억. ⓒ왓챠
맛이 살려낸 기억. ⓒ왓챠

다정 또한 기억하는 사람이다. 2화 '공간이동의 기적, 돔베국수'에서 다정은 건강하던 시절, 가족과 함께 갔던 제주도 애월에 있는 한 해변의 이름을 말하려고 하는데 도무지 떠오르지가 않는다. 그러나 누구의 힘도 빌리고 싶지 않다. 아들과 출판사 직원이 스마트폰을 꺼내 검색해준다는 것을 손을 내둘러 막으며 비장하게 선언한다. “내가 기억해낼 거야!” 그날 저녁, 창욱이 여러 번의 실패 끝에 만들어낸 제주식 고기국수 국물을 한 입 떠먹고 다정은 큰 소리로 외친다. 그때 갔던 그 해변의 이름을.

창욱과 다정은 더 쉽고 빠른 길을 놔두고 굳이, 글과 기억의 먼 길을 돌아간다. 두 사람이 글과 책에 종사하는 인물이어서가 아니다. “시간이 별로 많지 않”은 이들은 본능으로 안다. 할 수 있는 최선이 무엇인지. 그것은 간단하다. 단숨에 먹어치우는 것이 아니라 느긋하게 음미하는 것, 주문하고 배달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내는 것, 검색하는 것이 아니라 기억해내는 것, 한 줌도 그냥 흘려보내지 않겠다는 다짐을 언어로 옮겨내는 것, 옷을 맞춰 입고 사진을 찍어 거실 액자에 걸어두는 것, 오늘이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예감으로 함께 밤을 지새우는 것. 그리고 한때 죽을 만큼 미워한 서로를 향해 친절하고 너그러워지는 것. “왜 내 부탁을 들어줬어?”라는 물음에 “당신도 나에게 똑같이 해줬을 테니까.” 믿어 의심치 않는 것.

 

짧은 순간을 영원으로 만드는 레시피

이제는 웃을 수 있다. ⓒ왓챠
이제는 웃을 수 있다. ⓒ왓챠

다정이 떠나고 2년 뒤, 창욱은 글쓰기 특강 차 방문한 제주를 걷고 또 걸으며 다정과의 지리했던 결혼 생활 그리고 짧지만 촘촘했던 이별의 시간을 뒤로한 채 말한다. “이제 익숙하지 않은 일에 익숙해져야겠지만, 왠지 크게 두렵지는 않다.” 멀리 뿌연 바다가 보이고 양옆으로는 하얀 풍력 발전기가 돌아가는 산등성이의 오르막과 내리막을 지나 다시 부엌으로 돌아온 창욱. 오늘 메뉴는 다정이 호스피스 병실에 누워 레시피를 읊어주었던 김치솥밥이다. 혼자 먹는 밥상이지만 북엇국도 끓이고 정성스럽게 차린다. 아, 혼밥러 필수템인 ‘뒤에서 혼자 떠드는 TV’도 빼놓을 수 없지. 그가 다정의 병간호를 하면서 기록해둔 레시피들은 곧 책으로 묶여 나올 예정이다. 창욱의 바람대로 “슬픔이나 눈물”은 뺀, 그 대신 쥐똥고추를 한 3개쯤 넣은 맵기로. 김치솥밥이 다 됐다. 딱 2인분 양이다.

순간은 영원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순간의 끝을 움켜쥘 수 있다. 기록하는 손으로, 기억하는 입으로, 병동 주차장에서 구워 먹는 무항생제 삼겹살로, 도저히 삼킬 수 없는 양배추즙으로, 엎질러진 망고주스로, 쥐똥고추 3개로. 6시간짜리 영상을 12개의 사건으로, 그리고 한 달 반이라는 그리 짧지만은 않은 시간으로, “그 순간이 영원하길” 바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 과감히 추천한다. 이미 완결 난 드라마지만 날 잡고 몰아보는 대신 한 편씩 띄엄띄엄, 어쩌다 한 번씩 꺼내보라고. 순삭이 아닌 만끽의 매력에 오래도록 빠져보라고.  

유해강 기자 haekang.yoo@huffpost.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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