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소비시장이 일본을 닮아가고 있다. 저출산과 고령화로 인구 감소가 현실화하고 내수 회복이 더딘 가운데 외국인 관광객과 이들의 소비는 빠르게 늘고 있다. 국내 소비시장의 성장 기반은 약해지는 반면 해외에서 유입되는 소비는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는 셈이다. 국내 소비시장의 무게중심이 달라지고 있다는 신호이기도 하다.
일본은 이러한 변화를 먼저 겪고 있다. 외국인 관광객과 관광 소비가 역대 최대치를 경신하며 관광산업이 호황을 누리고 있지만, 일본인의 숙박 수요는 오히려 감소했다. 외국인 소비가 관광산업의 성장을 이끄는 동안 자국민의 소비 여건까지 함께 나아진 것은 아니다.
한국 역시 외국인 소비가 유통업계의 주요 성장 동력으로 떠오른 만큼, 관광 호황과 내수 부진이 공존하는 일본의 사례를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일본 도쿄 신주쿠 가부키초 전경. 외국인 관광객이 늘면서 일본 관광시장에서 외국인 소비의 영향력이 커지고 있다. ⓒ연합뉴스
6일 유통업계의 동향을 종합해보면 국내에서 외국인 고객의 존재감이 빠르게 커지고 있다. 과거 외국인 소비가 면세점과 백화점 등 관광객 방문이 잦은 일부 업종에 집중됐다면 최근에는 편의점과 식품 등 일상 소비 영역으로 확산하고 있다. 외국인 관광객이 늘면서 쇼핑뿐 아니라 식음료와 생활용품 구매까지 국내 소비시장의 새로운 수요로 자리 잡고 있다.
2025년 한국을 찾은 외국인 관광객은 1894만 명으로 역대 최대를 기록했다. 성장세는 올해 더 가팔라졌다. 문화체육관광부에 따르면 2026년 1~9월 방한 외국인은 1711만 명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21.5% 증가했다.
같은 기간 외국인의 관광 분야 카드 소비액은 15조9416억 원으로 47.7% 늘어 방문객 증가율의 두 배를 웃돌았다. 외국인 소비가 국가 경제 전체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아직 제한적이지만, 관광·유통 등 일부 업종에서는 매출을 좌우하는 주요 변수로 부상했다.
BGF리테일이 운영하는 편의점 CU의 2026년 3분기 외국인 대상 매출은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66.8% 증가했다. 부산 지역 증가율은 133.3%에 달했고, 전체 매출에서 외국인 매출이 차지하는 비중도 2.5%로 높아졌다. 외국인 관광객이 많이 찾는 지역을 중심으로 편의점 소비가 늘면서 식음료와 생활용품 등 일상 소비 영역에서도 외국인 고객의 존재감이 커지고 있다.
백화점에서도 외국인 소비가 빠르게 늘었다. 롯데·신세계·현대백화점 3사의 2026년 상반기 외국인 매출은 1조7200억 원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두 배 이상 증가했다. 롯데백화점의 1~9월 외국인 매출은 110% 늘었고, 신세계백화점은 8500억 원으로 두 배 이상 증가했다.
현대백화점 더현대 서울도 같은 기간 외국인 매출이 135% 늘었다. 특히 롯데백화점 본점과 신세계백화점 본점의 외국인 매출 비중은 각각 약 30%, 28.9%에 달했다. 외국인 소비가 편의점부터 백화점까지 유통업 전반으로 확산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반면 국내 소비시장의 장기적 기반은 약해지고 있다. 국가데이터처에 따르면 2025년 합계출산율은 0.80명으로 전년보다 소폭 상승했지만, 여전히 세계 최저 수준이자 OECD 회원국 중 가장 낮다. 출생아 수는 25만4500명에 그쳤다. 장래인구추계상 총인구는 2025년 5168만 명에서 2072년 3622만 명으로 감소할 전망이다. 65세 이상 인구 비중은 같은 기간 20.3%에서 47.7%로 높아질 것으로 예상된다.
소비시장의 기반이 되는 인구가 줄어드는 동시에 고령층 비중은 커지면서 소비시장 규모와 수요 구조에도 변화가 불가피해지고 있다.
민간소비 회복도 제한적이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2025년 민간소비 증가율은 1.3%에 그쳤다. 2026년 들어서도 소비 회복세는 뚜렷하지 않다. 1분기 민간소비는 전 분기보다 0.5% 증가했지만, 3분기에는 0.2% 감소하며 3년 9개월 만에 처음으로 역성장했다. 물가 부담도 이어지고 있다. 2026년 10월 소비자물가는 지난해 같은 달보다 2.8% 상승했고, 교통과 음식·숙박 물가는 각각 6.8%, 3.0% 올랐다.
일본에서는 이러한 현상이 먼저 나타났다. 외국인 관광 소비가 내국인 국내 여행 소비보다 빠르게 늘면서 관광시장에서 외국인 수요의 영향력이 커지고 있다. 일본 관광청에 따르면 2025년 방일 외국인 여행 소비액은 9조4559억 엔(약 81조2262억 원)으로 지난해보다 16.4% 증가했다. 외국인 숙박 일수는 8.2% 늘어난 반면 일본인 숙박 일수는 3.8% 감소했다. 관광 소비 증가와 숙박 수요 모두 외국인이 이끄는 가운데 내국인 여행 수요는 상대적으로 위축됐다.
이러한 소비 격차는 관광객이 몰리는 지역에서 내국인의 여행 부담을 키우는 요인으로도 작용한다. 대표적 사례가 교토다. 교토시 관광협회에 따르면 2025년 교토 주요 호텔의 평균 객실 요금은 2만1286엔(약 18만2847원)으로 지난해보다 5.8% 올라 역대 최고치를 기록했다. 같은 기간 외국인 숙박객은 14.6% 늘었지만 일본인 숙박객은 10.0% 감소했다. 관광객 수요 증가와 원자재 가격·인건비 상승 등이 객실 요금 인상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분석됐다.
외국인 관광객의 지출이 관광산업의 성장을 이끄는 동안 일본 내국인의 소비 회복은 더디다. 관광 수요 확대가 내수 전반의 회복으로 이어지기보다 외국인과 내국인 사이의 소비 격차를 키울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는 배경이다.
일본 총무성에 따르면 2026년 9월 소비자물가는 지난해 같은 달보다 2.1% 상승했다. 물가 상승세가 이어지는 가운데 가계의 소비지출도 줄었다. 2026년 8월 2인 이상 가구의 실질 소비지출은 지난해 같은 달보다 3.1% 감소해 9개월 연속 하락했다. 실질임금은 올해 들어 개선세를 보였지만 소비 회복으로 이어지지는 않고 있다. 임금 상승에도 물가 부담과 소비 심리 위축이 이어지면서 여행과 외식 등 선택적 지출을 늘리는 데 신중한 분위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