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중간선거 이후 미국·러시아·우크라이나 3국 종전 협상이 추진되는 가운데 전쟁 비용을 부담해 온 유럽은 정작 협상 참여조차 보장받지 못하고 있다.
러시아가 유럽 대표단의 참여에 반대하는 데다 동·서유럽 국가들 사이에서도 협상 대표성과 대러시아 정책을 둘러싼 이견이 드러나면서 유럽의 외교력이 시험대에 올랐다.
유럽의 안보 질서를 좌우할 전쟁이지만 종전 협상은 미국이 주도하고, 전후 복구와 안보 보장의 상당 부분은 유럽이 책임져야 하는 상황이 펼쳐지고 있다. 유럽이 막대한 경제력에도 협상 주도권을 확보하지 못한 배경에 관심이 쏠린다.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유럽연합 집행위원장. ⓒ AFP통신=연합뉴스
1일(현지시각) 파이낸셜타임스와 AP통신, 가디언 등 외신을 종합하면 유럽은 미국에 대한 군사적 의존과 국가별 이해관계 차이로 우크라이나 종전협상에서 영향력을 확보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 전쟁 비용은 유럽이 부담, 협상 주도권은 미국에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11월 중 아랍에미리트(UAE) 아부다비에서 미국·러시아·우크라이나 3국 협상이 열리기를 희망하고 있다. 그러나 미국은 구체적 일정을 확정하지 않았고 러시아는 유럽 대표단을 초청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문제는 전쟁 비용을 부담하는 주체와 협상을 주도하는 주체가 다르다는 점이다.
독일 킬세계경제연구소에 따르면 2025년 유럽의 대우크라이나 군사 지원은 2022~2024년 연평균보다 67% 증가했다. 유럽연합(EU)은 2026~2027년 우크라이나의 재정과 국방을 지원하기 위한 900억 유로(약 134조6천억 원) 규모의 대출 프로그램도 마련했다.
이처럼 유럽이 전쟁 비용의 상당 부분을 부담하면서도 협상 과정에서는 그에 걸맞은 영향력을 확보하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유럽의 군사적 한계도 이러한 불균형을 심화시키는 요인이다. 유럽 국가들은 우크라이나에 대한 지원을 확대했지만 방공망 등 핵심 무기체계에서는 여전히 미국에 의존하고 있다. 경제적 지원 규모가 커졌다고 해서 미국이 가진 군사적 영향력까지 대체할 수 있는 것은 아닌 셈이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 ⓒ 젤렌스키 엑스=연합뉴스
◆ 영국·프랑스·독일과 폴란드·헝가리, 서로 다른 이해관계
유럽이 협상 주도권을 확보하지 못한 배경에는 국가별 외교 전략의 차이도 자리 잡고 있다.
파이낸셜타임스는 10월31일 미국과 우크라이나가 영국·프랑스·독일로 구성된 'E3'를 유럽의 협상 대표로 선호하지만 다른 유럽 국가들의 동의를 얻지 못하고 있다고 전했다.
폴란드는 우크라이나 지원과 러시아에 대한 강경 대응을 강조하면서도 서유럽 중심의 협상 구조에 반대해 왔다. 이탈리아 역시 주요 협의에서 배제되는 데 불만을 나타냈다.
반면 헝가리와 슬로바키아는 러시아 제재와 우크라이나 지원 자체를 놓고 다른 유럽연합 회원국들과 충돌해 왔다. 협상 대표국 선정뿐 아니라 대러시아 정책에서도 견해가 엇갈리는 것이다.
핀란드와 노르웨이가 러시아와 직접 접촉했던 문제도 논란으로 떠오르고 있다. 2026년 10월 말 알렉산데르 스투브 핀란드 대통령과 요나스 가르 스퇴레 노르웨이 총리가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통화하자 일부 유럽 동맹국에서는 공동 대응을 약화할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됐다.
미국 카네기국제평화재단에 2026년 6월 기고한 아르카디 모셰스 핀란드 국제문제연구소 러시아·동유럽·유라시아 연구프로그램 책임자는 "유럽이 하나의 목소리를 내지 않는 한 어떠한 성공도 가능하지 않을 것이다"며 "유럽연합(EU) 회원국들의 이해관계는 안보에서 에너지에 이르기까지 서로 같지 않다"고 지적했다.
요나스 가르 스퇴레 노르웨이 총리(왼쪽)와 알렉산데르 스투브 핀란드 대통령. ⓒ EPA=연합뉴스
◆ 제재·동결자산 쥔 유럽, 협상력 되찾을 수 있나
그렇다고 유럽에 협상 수단이 없는 것은 아니다.
유럽은 러시아에 대한 경제제재와 동결 러시아 자산, 우크라이나의 유럽연합 가입 문제 등 종전 합의의 이행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수단을 보유하고 있다.
유럽외교협회(ECFR)의 마리 뒤물랭 당시 확대유럽 프로그램 책임자는 2025년 4월 분석에서 "유럽은 러시아에 대한 제재 외에도 우크라이나에 대한 지속적인 군사·재정 지원을 활용해 협상에 지렛대로 활용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다만 유럽이 종전 협상에서 완전히 배제됐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우크라이나는 유럽의 협상 참여를 요구하고 있으며 종전 이후 안보 보장과 재건 문제에서도 유럽의 협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결국 관건은 유럽이 막대한 경제적 지원과 제재 권한을 공동의 외교 전략으로 전환할 수 있느냐다. 유럽이 내부의 이견을 극복하지 못한다면 전쟁 비용을 부담하면서도 전후 안보질서를 결정하는 과정에서는 제한적 영향력만 행사할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