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지선 현대백화점그룹 회장이 한섬 수장 교체 카드를 꺼냈다. 주요 계열사 대표를 대부분 유임시킨 가운데 한섬만 대표를 바꾼 것은 이례적이다.
다른 계열사들이 기존 경영진의 성과를 바탕으로 사업의 연속성을 택했다면, 한섬에는 새로운 성장 과제를 이끌 리더십이 필요하다고 판단한 것으로 풀이된다.
7년 만의 대표 교체에는 실적 부진을 만회하는 동시에 해외 브랜드 사업을 확대하고, 이를 실질적 매출과 이익으로 연결해야 한다는 정 회장의 고민이 담겼다.
정지선 현대백화점그룹 회장이 해외 사업 확장을 그룹의 중장기 성장 과제로 내세운 가운데 한섬의 글로벌 사업 경쟁력 강화에도 힘을 싣고 있다. ⓒ현대백화점그룹
31일 현대백화점그룹에 따르면 2027년 정기 임원인사에서 주요 계열사 대표 대부분이 유임되거나 승진한 가운데 대표이사를 교체한 곳은 한섬뿐이었다. 2020년 김민덕 전 한섬 대표 취임 이후 약 7년 만의 교체다. 현대백화점·현대지에프홀딩스·현대그린푸드·현대홈쇼핑·현대디에프 등 주요 계열사 대표 5명은 모두 자리를 지키거나 승진했다. 반면 한섬은 유태영 전무를 신임 대표로 내정했다.
왜 정지선 회장은 한섬만 대표를 바꿨을까. 한섬이 다른 계열사보다 유독 실적이 부진했거나 영업환경이 급격히 나빠졌기 때문일까.
올해 실적만으로는 이번 인사를 설명하기 어렵다. 에프앤가이드에 따르면 올해 3분기 주요 계열사의 영업이익은 대부분 증가한 것으로 추정됐다. 지난해 같은 기간과 비교해 현대백화점은 17.7%, 현대그린푸드는 9%, 현대홈쇼핑은 104.7% 증가한 것으로 관측됐다. 한섬도 영업이익 87억 원으로 248% 증가해 상대적으로 높은 증가율을 보인 것으로 분석됐다.
다만 한섬의 증가율에는 기저효과가 크게 작용한 것으로 파악됐다. 지난해 3분기 영업이익이 25억 원에 그쳤기 때문이다. 장기적으로 보면 한섬의 수익성은 뚜렷한 하락세를 보였다. 영업이익은 2022년 역대 최대 실적을 기록한 이후 3년 연속 감소했다. 2022년 1683억 원이던 영업이익은 2023년 1005억 원, 2024년 635억 원, 2025년 522억 원으로 내려 앉았다. 영업이익률도 10.9%에서 3.5%로 떨어지며 두 자릿수에서 한 자릿수로 낮아졌다.
그동안 매출은 사실상 제자리에 머물렀다. 2022년 1조5422억 원으로 역대 최대 매출을 기록한 뒤 2023년 1조5286억 원, 2024년 1조4853억 원, 2025년 1조4918억 원으로 4년 연속 1조5천억 원 안팎을 유지했다. 2022년과 비교해 지난해 매출 감소 폭은 3.3%에 그쳤다. 반면 같은 기간 영업이익은 69% 줄었다. 외형은 유지했지만 수익성은 크게 뒷걸음질 친 셈이다.
한섬이 이렇게 수익성 회복이 더딘 배경에는 수입 브랜드 비중 확대에 따른 수익 구조 변화가 자리하고 있는 것으로 분석된다. 한섬은 자체 브랜드인 타임·시스템의 해외 진출을 추진하는 동시에 해외 수입 브랜드를 국내에 들여오며 브랜드 포트폴리오를 넓혀 왔다.
하지만 수입 브랜드는 해외 브랜드사로부터 상품을 매입해 판매하는 구조로 자체 브랜드와 상품 원가 및 수익 구조가 다르다. 해외 브랜드사에 지급하는 상품 매입대금과 신규 브랜드 안착을 위한 마케팅·매장 운영 비용 등이 수익성에 부담을 줄 수 있다. 수입 브랜드 매출 비중이 커지면 전체 매출에서 상품 원가가 차지하는 비중이 높아져 매출총이익률(GPM) 개선이 제한될 가능성도 있다.
한화투자증권 이진협 연구원도 이러한 가능성을 짚었다. 그는 "소비 호조에 따른 정상가 판매율 개선에도 GPM 반등 폭이 제한적이었다"며 "수입 브랜드 매출 비중 증가가 GPM 반등을 제한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확인이 필요하다"고 바라봤다. 일시적 재고 조정이나 비용 증가를 넘어 수입 브랜드 확대에 따른 수익 구조 변화가 장기적 부담으로 작용하는지 살펴봐야 한다는 의미다.
해외 사업도 아직 실적 기여보다 투자 부담이 큰 단계다. 2026년 1분기 프랑스 법인은 매출 4억 원에 순손실 6억8천만 원을 기록했고, 중국 법인은 매출이 2천만 원으로 줄어든 가운데 순손실 3억 원을 냈다. 두 법인 모두 적자를 이어간 셈이다. 한섬은 자체 브랜드의 해외 진출과 수입 브랜드 확대를 통해 성장 기반을 넓히고 있지만, 해외 사업이 안정적 수익원으로 자리 잡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한 상황이다.
종합해보면 한섬의 당면 과제는 두 갈래로 좁혀진다. 비중이 커진 해외 브랜드 사업에서 수익성을 확보하는 동시에 타임·시스템 등 자체 브랜드의 해외 진출 성과를 만들어내야 한다.
특히 한섬은 해외 브랜드 사업을 새롭게 시작하는 단계가 아니다. 그동안 넓혀 온 브랜드 포트폴리오를 안정적 수익원으로 키워야 하는 단계에 들어섰다. 해외 브랜드 도입과 자체 브랜드의 글로벌 진출을 개별 사업부의 성과로 남기는 데 그치지 않고, 상품 구성부터 재고·투자·수익성까지 회사 전체의 관점에서 조율해야 한다. 해외 사업의 외형 확대를 실질적 실적 개선으로 연결하는 일이 경영 전면에 놓인 셈이다.
이러한 한섬의 당면 과제는 개별 계열사의 실적 회복에 그치지 않는다. 현대백화점그룹이 추진하는 중장기 성장 방향과도 연결돼 있다. 현대백화점그룹은 비전 2030에서 유통·식품·패션·리빙 등 주력 사업의 경쟁력을 강화하고 해외 사업을 확장해 2030년 매출 40조 원대를 달성하겠다는 목표를 제시했다.
패션 부문을 맡은 한섬 역시 그룹의 핵심 사업 포트폴리오를 구성하는 계열사다. 자체 브랜드의 글로벌 경쟁력을 높이고 해외 브랜드 사업의 수익성을 확보하는 일은 한섬의 실적 개선을 넘어 그룹의 패션 사업 경쟁력과 해외 성장 기반을 강화하는 과제이기도 하다.
이런 상황에서 정지선 회장이 기존 대표를 유임하는 대신 해외 패션 사업을 이끌어 온 유태영 전무를 신임 대표로 발탁한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김민덕 전 대표는 재임 기간 재무구조 개선과 사업 다각화를 추진하며 2022년 역대 최대 실적을 이끌었다.
다만 국내 패션 시장의 성장 둔화와 수익성 하락, 해외 브랜드 사업 확대라는 새로운 과제가 부각되면서 한섬 경영의 무게중심도 달라졌다. 재무·경영관리 중심의 운영을 넘어 해외 사업의 실행력을 높이고 확장한 사업을 수익으로 연결하는 역량이 중요해진 것이다.
특히 해외 브랜드 사업은 상품 발굴과 매입부터 재고·가격 정책·매장 운영·마케팅까지 여러 기능이 맞물려 있다. 이를 해외패션본부 차원의 사업 운영에 한정하지 않고 회사 전체의 상품 구성과 투자 우선순위, 수익성 관리로 연결하려면 전사적 의사결정 권한을 가진 최고경영자의 역할이 중요하다.
특히 이번 인사는 외부에서 새로운 경영자를 영입하기보다 해외 패션 사업의 발굴과 운영을 직접 경험한 내부 전문가에게 대표직을 맡겼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사업 구조와 브랜드별 특성을 이해하는 내부 인사를 통해 기존 사업의 연속성을 유지하면서 해외 사업의 실행력과 수익성 관리 역량을 높이려는 선택으로 해석된다.
유태영 신임 대표의 경력은 이런 해석에 힘을 싣는다. 해외 브랜드 도입부터 국내 유통·운영, 자체 브랜드의 해외 진출까지 한섬의 글로벌 사업 전반을 경험했다는 점에서 해외 사업의 실행력을 높이고 수익성을 개선해야 하는 현 과제에 적합한 인물로 볼 수 있다.
유 대표는 2019년 한섬에 합류한 뒤 패션사업본부장과 해외패션담당 상무, 해외패션본부장 전무를 거쳤다. 해외패션본부장으로서 신규 해외 브랜드 발굴과 국내 사업 운영을 이끌었으며, 타임·시스템 등 자체 브랜드의 글로벌 진출도 경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