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산에너빌리티가 체코 두코바니 원전 건설사업 시공협상에서 예상치 못한 변수에 직면했지만 이를 성장동력 전반의 위기로 볼 필요는 없다는 평가가 나온다. 원전 시공계약과 별도로 이미 5조6천억 원 규모의 주기기 공급계약을 확보한 데다 국내외 원전 사업에서 핵심 기자재 공급사로서 입지도 탄탄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두산에너빌리티의 성장동력은 원전 시공을 넘어 주기기와 가스터빈, 소형모듈원전(SMR) 등 고부가가치 기자재 사업으로 넓어지고 있다. 특히 인공지능(AI) 데이터센터 확산에 따른 전력 수요 증가가 가스터빈 사업의 새로운 기회로 떠오르면서 체코 원전 협상 차질에 따른 부담을 상쇄할 수 있는 기반도 커지고 있다.
실제 두산에너빌리티는 올해 가스터빈 분야에서 지난해 연간 수주 규모를 넘어서는 성과를 거뒀고 4분기부터는 미국 SMR 기업들과의 협력을 바탕으로 추가 수주도 추진하고 있다. 원전과 가스터빈을 양대 축으로 수주 포트폴리오를 다변화하는 동시에 수익성 개선까지 이어가는 모습이다.
체코 원전 시공협상이라는 불확실성이 당분간 이어질 수 있지만 두산에너빌리티는 기존 원전 주기기 공급계약을 안정적으로 이행하는 가운데 가스터빈과 SMR 사업의 수주 확대가 더해지면서 중장기 성장세도 이어질 것으로 예상된다.
두산에너빌리티가 체코 두코바니 원전 건설사업 시공계약 차질에도 가스터빈과 소형모듈원전(SMR)을 앞세워 미래 실적 개선 가능성을 키우고 있는 것으로 분석된다. 사진은 두산에너빌리티가 개발하고 제작한 380MW(메가와트)급 가스터빈 제품. ⓒ두산에너빌리티
2일 한국수력원자력에 따르면 2027년 안에 체코 두코바니 원전의 새 시공사를 찾기 위한 준비 등 후속조치를 조속히 추진하겠다는 방침을 세웠다.
체코 두코바니 원전 건설사업은 한수원 중심 ‘팀코리아’가 체코 두코바니 지역에 1천MW(메가와트)급 한국형 원전(APR1000) 2기를 공급하는 프로젝트로 총사업비는 4070억 코루나(약 25조 원) 규모에 이른다.
한수원은 2018년 대우건설-두산에너빌리티 컨소시엄을 체코 원전사업의 시공사로 선정하고 수주를 적극적으로 추진한 끝에 지난해 5월 발주사인 두코바니II 원자력 발전소(EDU II)와 본계약을 통해 사업을 본궤도에 올렸다. 다만 한수원과 시공 컨소시엄 사이 공사비 이견을 좁히지 못해 10월29일 팀코리아 내부에서 시공협상이 결렬됐다.
한수원은 기본설계 단계의 물량 기준으로 계약금액을 확정하는 총액확정계약 방식을 제시했고 시공 컨소시엄은 상세설계 과정에서 발생하는 물량 증가에 따른 비용 리스크를 충분히 반영할 수 있는 계약조건이 필요하다는 입장을 내비쳤다.
당장 한수원은 신규 시공사 선정 이전까지 필요한 설계·인허가 업무가 중단되지 않도록 직접 수행하거나 체코 설계사를 활용하는 방안도 검토하기로 했다. 이는 추가적 일정 지연이 발생하지 않도록 관리하기 위함이다.
시공계약 협상이 멈췄지만 원전업계 안팎에서는 기존 시공 컨소시엄이었던 대우건설과 두산에너빌리티의 상황이 다소 다르다는 평가가 나온다. 대우건설은 한수원과 공사비 협상 관련 공방을 벌인 가운데 두산에너빌리티는 국내 신한울 3·4호기 시공에도 참여하는 등 최근까지 원전 시공을 진행하고 있고 한수원과 갈등도 제한적인 것으로 파악되기 때문이다.
10월29일 대우건설이 시공 컨소시엄 주간사로서 협상 결렬에 관한 입장문을 냈을 때 두산에너빌리티는 별도 참고자료를 통해 대우건설의 입장과 선을 그으며 한수원이 새 시공사를 찾는 절차에 다시 참여하겠다는 뜻을 내비쳤다. 두산에너빌리티는 3년 전부터 체코에 인력을 투입해 환경 자료 확보, 초기 인허가, 설계 업무에 참여해 온 만큼 재입찰에서 다시 계약을 따낼 가능성이 높다는 전망도 나온다.
특히 두산에너빌리티는 원전 분야 ‘팀코리아’에서 국내 유일의 원전 주기기 제작기업으로 시공을 제외하고도 핵심 역할을 맡고 있다는 점이 체코 두코바니 원전 관련 시공계약 이슈 속에서도 기업가치를 지킬 수 있는 요인으로 꼽힌다.
이번 체코 두코바니 원전 사업에서 두산에너빌리티는 핵심 공급망 역할을 맡아 지난해 12월 원전 주기기(4조9290억 원) 및 터빈발전기(7111억 원)를 합쳐 모두 5조6천억 원이 넘는 공급계약을 한수원과 체결하는 등 시공계약과 별개로 원자로 등의 공급 프로젝트를 정상적으로 진행하고 있다.
물론 이번 이슈는 팀코리아 원전 사업의 신뢰도와 역량, 후속 해외 수주 경쟁력에 불확실성을 촉발했다는 점에서 두산에너빌리티에도 변수로 꼽힌다.
다만 국내 민관의 행보나 체코 현지 발주처의 사업 진행 의지가 강한 점 등을 고려하면 체코 두코바니 사업 자체는 지속적으로 추진될 공산이 크다. 또 이후 팀코리아의 해외 사업도 미국을 중심으로 계속되기 때문에 두산에너빌리티에 우호적 환경은 이어질 것으로 예상된다. 이날 산업통상부도 직접 장·차관 주도 아래 비상관리체계를 가동하기 시작했고 대우건설도 시공계약 재협상을 위해 산업부 중재를 요청하기도 했다.
김세련 LS증권 연구원은 10월30일 건설·원전산업 분석보고서에서 “두산에너빌리티의 기존 수주 목표치에 체코 원전 시공은 반영돼 있지 않았다”며 “원자로, 터빈발전기 등 기자재 납품이 정상적으로 이뤄지고 있다는 부분은 두산에너빌리티에 긍정적 요인이다”고 바라봤다.
두산에너빌리티 주가는 체코 두코바니 원전 시공계약 이슈가 불거진 탓에 대부분의 원전 관련주와 함께 급락했다. 두산에너빌리티 주가는 종가 기준으로 10월29일과 30일 각각 4700원(7.65%), 3100원(5.47%) 하락했다.
다만 두산에너빌리티는 뚜렷한 수익성 개선세를 이어가면서 기업가치 상승을 향한 기대감은 여전히 유효하다는 관측이 나온다.
두산에너빌리티는 주요 기준 자회사인 건설기계 부문의 두산밥캣 등을 제외한 에너빌리티 부문에서 올해 1~3월 매출 5조9538억 원, 영업이익 2755억 원을 거뒀다. 지난해 같은 기간과 비교해 매출은 7.8%, 영업이익은 105.0% 뛴 것이다.
특히 영업이익률은 같은 기간 2.4%에서 4.6%로 2배 가까이 높였다. 올해 분기별로 두산에너빌리티 에너빌리티 부문의 영업이익률은 1분기 3.0%, 2분기 4.4%에 이어 3분기 6.6%로 오름세를 나타내고 있다. 두산에너빌리티는 원전과 가스터빈 등 대표적 고수익 프로젝트가 매출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높이면서 수익성을 개선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두산에너빌리티는 수익성이 우수한 원전과 가스터빈을 중심으로 미래 실적의 근간이 되는 수주를 쌓아가고 있다는 점도 긍정적으로 평가된다.
두산에너빌리티는 올해 1~3분기 신규수주 10조 원을 기록했다. 3분기 누적 가스터빈이 포함된 가스·수소 분야에서 3조8천억 원의 수주를 따내며 지난해 이 분야의 연간 신규수주를 크게 웃돈 것이 주효했다. 지난해에는 전체 신규수주 14조7천억 원의 절반 가까운 성과를 거둔 원전(6조8천억 원)이 수주를 주도했다면 올해에는 가스터빈이 새로운 동력으로 더해진 모양새다.
두산에너빌리티는 국내 시장과 함께 데이터센터 수요 증가에 발맞춰 미국 텍사스를 주력 시장으로 가스터빈 사업을 확대하고 있다. 두산에너빌리티는 가스터빈 고객사와 2031년 인도 물량까지 협의를 진행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여기에 4분기에는 SMR 일감이 본격적으로 두산에너빌리티 수주잔고에 포함될 것으로 전망된다.
두산에너빌리티는 4분기 1조 원 수준의 SMR 주기기 수주를 추가한다는 목표를 두고 있다. 올해 연간 신규수주 목표인 13조3천억 원 달성과 미래 성장동력 확보라는 두 마리 토끼를 SMR 분야에서 노리고 있는 것이다.
두산에너빌리티는 10월29일 미국 뉴스케일파워와 SMR 상부 원자로 모듈(URPV) 제작계약을 맺으면서 현지 최대 SMR 사업의 첫 원자로 제작에 본격적으로 착수했다. 상부 원자로는 고온·고압의 냉각재를 담는 원자로 압력용기의 상부를 구성하는 핵심 기자재다.
두산에너빌리티는 미국 테라파워, 엑스에너지, 영국 롤스로이스SMR 등 다수의 기업과 SMR 분야에서 협력하면서 중장기적으로도 수주 확대 기반을 마련한 것으로 평가된다. 창원 본사 부지에 SMR 전용 공장을 신축하는 등 생산역량 확대 및 제조역량 고도화도 추진하고 있다.
조재원 키움증권 연구원은 10월30일 두산에너빌리티 분석보고서에서 “올해 4분기부터 내년까지 해외 신규 고객사를 향한 가스터빈, SMR 모듈 제작계약, 미국 웨스팅하우스의 (대형원전) 기자재 발주, 국내 원전 시장 확대 등의 수주 기회가 현실화할 수 있다”며 “실적과 수주 성장이 본격화하는 가운데 기업가치는 아직 이런 기대를 반영하지 않고 있는 수준이다”고 분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