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항공사 조종사 4명 중 3명이 비행 중 자신도 모르게 순간적으로 잠드는 '마이크로슬립(microsleep)'을 경험한 것으로 나타났다.
영국 일간 가디언은 26일(현지시간) 유럽조종사협회(ECA)가 지난 8월 기장과 부기장 약 72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응답자의 75%가 최근 4주 사이 운항 중 최소 한 차례 이상 마이크로슬립을 경험했다고 보도했다.
비행기 이미지. AI 합성 이미지
마이크로슬립은 본인의 의지와 관계없이 아주 짧은 순간 잠에 빠지는 현상이다. 장시간 근무와 수면 부족, 불규칙한 비행 일정, 시차 등으로 발생할 수 있다. 특히 조종사의 주의력과 판단력을 떨어뜨리고 돌발 상황에 대한 대응을 늦출 수 있다는 점에서 항공 안전을 위협하는 요인으로 꼽힌다.
더 큰 문제는 극심한 피로를 느끼고도 조종간을 놓지 못하는 현실이다. 응답자의 24%는 피로로 정상적 비행 업무를 수행하기 어렵다고 판단되는 상황에서도 대체로 운항을 계속한다고 답했다. 응답자의 16.8%는 피로를 이유로 비행 부적합 상태를 신고하는 대신 병가를 낸다고 밝혔다.
최근 3개월 동안 피로 때문에 운항에서 빠졌어야 한다고 판단하면서도 실제 비행에 나선 적이 있다는 응답은 절반에 달했다. 반면 피로로 안전한 비행이 어렵다고 느낄 때 통상적으로 운항 부적합 상태를 신고한다는 조종사는 3명 중 1명에 그쳤다.
피로를 호소하기조차 쉽지 않은 조직문화도 문제로 드러났다. 응답자의 절반 가까이는 피로를 이유로 비행이 어렵다고 신고할 경우 회사로부터 불이익을 받을 수 있다고 우려했다.
소속 항공사의 피로 보고체계를 신뢰한다는 응답은 11.9%에 불과했다. 조종사의 피로를 관리하기 위해 마련한 제도가 정작 현장에서는 충분한 신뢰를 얻지 못하고 있는 셈이다.
국가별 격차도 컸다. 스페인에 기반을 둔 항공사 조종사 10명 중 4명은 피로한 상태에서도 대체로 비행을 계속한다고 답했다. 아일랜드와 프랑스 소재 항공사에서는 그 비율이 각각 3명 중 1명 수준이었다. 반면 영국 소재 항공사는 약 10%로 상대적으로 낮았다.
특히 아일랜드와 몰타 소재 항공사 조종사들은 운항 중 마이크로슬립을 경험한 비율이 높았다. 피로 신고에 따른 불이익을 우려하거나 회사의 보고체계를 신뢰하지 못하는 경향도 두드러졌다.
저비용항공사(LCC)와 항공기·승무원·정비·보험 등을 묶어 다른 항공사에 제공하는 웨트리스(Wet Lease) 항공사의 피로 관리 실태도 도마에 올랐다. 소속 항공사가 피로 위험을 적절히 관리하고 있다고 평가한 조종사는 저비용항공사에서 15.6%, 웨트리스 항공사에서 18.6%에 그쳤다.
근무시간을 늘리도록 하는 압박도 적지 않았다. 응답자의 약 40%는 최근 한 달 동안 최소 한 차례 이상 '기장 재량권(Commander's Discretion)'을 사용한 경험이 있다고 답했다. 기장 재량권은 예외적인 상황에서 기장이 승무원의 근무시간을 연장하거나 휴식시간을 단축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제도다.
조종사 약 70%는 근무시간 연장을 거부할 경우 불이익을 받을 수 있다고 우려했다. 예외적 상황에 대응하기 위해 마련된 제도가 현장에서는 조종사에게 또 다른 부담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지적이다.
다만 이번 조사는 조종사들이 직접 경험하고 인식한 피로 실태를 파악한 설문조사로, 실제 항공 사고 발생 위험을 측정한 결과는 아니다.
유럽조종사협회는 조종사 개인에게 피로 관리 책임을 떠넘기는 방식으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국내에서도 조종사의 피로를 관리하기 위한 법적 장치가 마련돼 있다. 항공안전법 제56조는 항공사가 승무시간과 비행근무시간 등의 제한기준을 준수하거나 국토교통부의 승인을 받은 피로위험관리시스템(FRMS)을 운영하는 방식으로 승무원의 피로를 관리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항공안전법 시행규칙 제127조도 조종사의 피로가 안전운항에 지장을 주지 않도록 항공사가 세부 기준을 운항규정에 마련하도록 하고 있다.
국내 연구에서도 심야비행과 장시간 운항, 시차 등이 조종사의 주요 피로 요인으로 지적됐다. 2023년 한국항공운항학회지에 발표된 연구에서는 대한항공 조종사 90명의 설문자료를 분석한 결과, 심야비행과 긴 비행시간, 시차 등이 피로를 가중하는 요인으로 나타났다. 연구진은 피로 보고제도를 확립하고, 조종사가 불이익을 우려하지 않고 자발적으로 피로를 신고할 수 있도록 개인정보 보호 등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고 제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