숏폼 영상은 점점 짧아지고, 콘텐츠는 갈수록 자극적이다. 몇 초 안에 시선을 붙잡지 못하면 가차 없이 다음 영상으로 넘어가는 시대, 그런데 핀란드에서는 정반대의 일이 벌어지고 있다.
10월15일(현지시각) 핀란드에서 라고토 로마뇰로 견종인 어미 개 ‘힐카(Hilkka)’의 새끼 강아지들이 잠을 자고 있다. 사진은 영상의 한 장면. ⓒ핀란드 공영방송 Yle 제공·AP통신/연합뉴스
주인공은 강아지 여섯 마리다. 하는 일이라고는 잠자고, 젖 먹고, 다시 잠드는 게 전부다. 화려한 편집도, 극적인 반전도 없다. 심지어 몇 시간씩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런데도 이 방송을 보겠다고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대체 이 강아지들에게 무슨 매력이 있는 걸까?
핀란드 공영방송 윌레(Yle)가 운영하는 '펜투라이브(Pentulive)'가 그 주인공이다. 핀란드어로 '강아지 생중계'라는 뜻의 이 프로그램은 어미 개와 새끼 강아지들의 일상을 24시간 실시간으로 보여준다.
올해 방송은 지난 6일(현지시각) 시작됐다. 이후 2주도 채 지나지 않아 누적 조회 수 600만 회를 돌파했다. 인구가 약 570만 명인 핀란드에서 벌어진 일이다.
먹고, 자고, 꼬물거리고 그게 전부인데?
2026년 10월15일(현지시간) 핀란드에서 라고토 로마뇰로 견종의 어미 개 ‘힐카’와 새끼 강아지들이 함께 쉬고 있다. 사진은 영상의 한 장면. ⓒ핀란드 공영방송 Yle 제공·AP통신/연합뉴스
펜투라이브가 처음 방송을 시작한 것은 2021년이다. 올해로 벌써 여섯 번째 시즌을 맞이한 펜투라이브는 매년 다른 견종의 어미 개와 새끼들이 시청자들을 만난다.
올해의 주인공은 이탈리아 원산 견종인 라고토 로마뇰로의 어미 개 '힐카(Hilkka)'와 새끼 여섯 마리다. 라고토 로마뇰로는 곱슬곱슬한 털에 테디베어를 닮은 외모가 특징이다. 귀여운 얼굴과 달리 후각도 뛰어나다. 땅속에 숨어 있는 트러플(송로버섯)을 찾아내는 개로 유명하다.
힐카는 지난 10일 암컷 두 마리와 수컷 네 마리를 낳았다. 출산 장면까지 생중계됐다. 이후 카메라는 강아지들의 일거수일투족을 담고 있다. 어미의 품에 파고들어 잠들고, 배가 고프면 꼬물꼬물 기어가 젖을 먹는다. 때로는 형제자매끼리 뒤엉켜 잠들기도 한다. 이게 방송의 거의 전부다.
제작진은 강아지들이 생활하는 집에 카메라를 설치하고 자연스러운 일상을 그대로 보여준다. 예능 프로그램처럼 재미있는 장면만 골라 편집하지 않는다. 극적인 사건을 만들거나 경쟁을 붙이는 '악마의 편집'도 없다. 가끔은 몇 시간 내내 잠자는 강아지만 볼 수도 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장면마저 기꺼이 지켜본다.
물론 마냥 귀여운 장면만 보여주는 것은 아니다. 과학 담당 기자와 동물 전문가들이 강아지의 성장 과정과 행동 특성, 올바른 양육 방법 등을 설명한다. 시청자들이 소통할 수 있는 채팅과 프로그램 관련 팟캐스트도 마련돼 있다. 말하자면 세상에서 가장 느긋한 육아 관찰 프로그램이자 반려동물 교육 방송인 셈이다.
요즘 콘텐츠 시장에서 '지루함'은 피해야 할 대상이다. 동영상은 점점 짧아지고, 화면은 빠르게 바뀐다. 시작 몇 초 안에 웃기거나 놀라게 만들지 못하면 시청자를 붙잡기 어렵다. 그런데 펜투라이브에는 이런 법칙이 통하지 않는다.
강아지들은 시청자를 웃기려고 애쓰지 않는다. 무언가를 보여줘야 한다는 부담도 없다. 그냥 배가 고프면 먹고, 졸리면 잔다. 카메라가 돌아가든 말든 자기 속도로 하루를 보낸다.
시청자도 마찬가지다. 화면에 온 신경을 집중할 필요가 없다. 일을 하다가 슬쩍 들여다보고, 커피를 마시면서 잠깐 구경해도 된다. 몇 시간 뒤 다시 접속해도 강아지들은 여전히 잠들어 있을지 모른다. 장면을 놓칠까 봐 조급해할 필요가 없는 방송, 어쩌면 그게 이 프로그램의 가장 큰 매력일지도 모른다.
특히 온종일 자극적인 뉴스와 영상에 노출되는 현대인들에게 이런 화면은 잠깐의 쉼표가 될 수 있다. 누군가 싸우거나 경쟁하지도 않고, 분노를 부추기거나 불안을 자극하지도 않는다. 그저 작은 생명들이 무럭무럭 자라는 모습을 함께 지켜볼 뿐이다. 극적인 사건은 없어도, 작은 변화는 계속된다.
핀란드의 계절적 특성을 생각하면 이런 장면이 주는 따뜻함은 더욱 특별하게 느껴진다. 10월 하순, 핀란드는 이미 겨울의 문턱에 들어섰다. 수도 헬싱키의 낮 최고기온은 10도 안팎, 오후 6시가 되기도 전에 해가 진다. 겨울이 깊어질수록 낮은 더 짧아지고 어둠은 길어진다.
바깥은 점점 쌀쌀해지는 계절에 집 안에서 화면을 켜면 서로 몸을 맞대고 잠든 강아지들이 보인다. 어미의 품에 얼굴을 묻고, 형제자매에게 기대어 체온을 나누는 모습이다. 세상은 바쁘게 돌아가지만 화면 속 강아지들은 서두르는 법이 없다. 보고 있으면 덩달아 마음의 속도를 조금 늦추게 된다.
기차가 7시간 달리고, 사슴이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이런 '느림의 미학'은 북유럽에서 낯선 풍경이 아니다. 이른바 '슬로 TV(Slow TV)'는 이미 하나의 장르로 자리 잡았다. 말 그대로 긴 시간 동안 일어나는 일을 별다른 편집 없이 보여주는 방송이다.
대표적인 사례가 2009년 노르웨이 공영방송 NRK가 선보인 기차 여행 프로그램이다. 노르웨이 베르겐에서 오슬로까지 약 7시간 동안 달리는 열차의 여정을 거의 그대로 방송했다. 창밖으로 산이 지나가고, 숲이 나타나고, 기차는 터널을 통과한다. 그저 기차가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함께 여행할 뿐이다. 그런데 이런 방송이 통했다.
이후 북유럽에서는 선박 여행과 자연 현상, 야생동물의 이동을 장시간 보여주는 프로그램이 잇따라 등장했다.
스웨덴 공영방송 SVT가 2019년부터 선보이고 있는 '위대한 무스 대이동(The Great Moose Migration)'도 그중 하나다. 봄마다 말코손바닥사슴인 '무스'들이 여름 서식지를 찾아 이동하고 강을 건너는 모습을 생중계한다.
문제는 무스가 언제 나타날지 아무도 모른다는 것이다. 제작진이 수십 대의 카메라를 설치해도 몇 시간 동안 텅 빈 숲이나 강만 비출 때가 있다.
시청자들은 어떻게 할까? 그냥 기다린다. 마침내 무스 한 마리가 모습을 드러내면 그 평범한 순간이 기다림의 보상이 된다. 이 방송은 2024년 조회 수 약 900만 회를 기록할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노르웨이에서는 순록 떼가 이동하는 과정을 일주일가량 생중계한 적도 있다.
빠른 편집도, 특별한 사건도 없지만 사람들은 시간을 내어 지켜본다. 무엇이 일어나는지를 보여주는 것뿐 아니라, 무언가 일어나기를 기다리는 시간 자체가 콘텐츠가 되는 것이다.
펜투라이브는 이런 슬로 TV에 한 가지 매력을 더했다. 바로 작은 생명들이 자라는 과정을 함께 지켜보는 즐거움이다. 시청자들은 강아지들이 처음 눈을 뜨는 순간을 기다리고, 첫걸음을 떼는 모습을 응원한다.
온라인 채팅에서는 강아지들의 상태를 이야기하고 이름을 정하는 과정에도 참여한다. 서로 얼굴도 모르고, 각자 다른 곳에서 화면을 바라보지만 모두가 같은 강아지들의 성장을 기다린다. 그렇게 작은 공동체가 만들어진다.
인기는 핀란드 국경도 넘었다. 네덜란드 공영방송은 펜투라이브의 방송 포맷을 구매했고, 스웨덴 공영방송 SVT도 올해 이 프로그램을 선보였다. 핀란드의 한 가정집에서 강아지들이 잠을 자고 젖을 먹는 모습이 이제 해외로 수출되는 방송 콘텐츠가 된 것이다.
방송은 오는 12월까지 약 8주간 이어진다. 그동안 강아지들은 눈을 뜨고, 걸음마를 배우고, 조금씩 세상을 탐색하게 된다. 지금은 어미의 품을 떠나지 못하는 작은 강아지들이지만, 결국 새로운 가족을 찾아 떠난다.
시청자들도 몇 주 동안 지켜본 강아지들과 작별해야 하는 순간이다. 탄생부터 성장, 이별까지, 특별한 대본이 없어도 그 자체로 하나의 이야기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