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을 받아도 아무 말 없이 상대방을 빤히 바라보는 '젠지 스테어(Gen Z Stare)', 지난해 소셜미디어에서 화제가 된 Z세대(1997년~2012년생)의 무표정한 응시를 일컫는 말이다. 기성세대는 이를 무례함으로 받아들이기도 하지만 황당함이나 냉소를 드러내는 반응이라는 해석도 있다.
하지만 무표정이 무관심을 뜻하는 것은 아니었다. Z세대가 이제 거리에서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손바닥을 붉게 물들이고, 분홍색 홍학을 흔들고, 바퀴벌레를 정치운동의 상징으로 내세운다.
언뜻 장난스럽고 기발해 보이지만 그 속에는 취업난과 주거 불안, 부패와 불공정에 대한 분노가 담겨 있다.
세르비아의 붉은 손바닥, 정권을 바꾸다
동남유럽 발칸반도에 위치한 세르비아에서는 학생들이 붉은 손바닥을 저항의 상징으로 내걸었다. 2024년 11월1일 노비사드 기차역 구조물 붕괴 사고로 16명이 숨진 사건이 계기가 됐다. '당신들의 손에 피가 묻었다'는 뜻으로 정부의 부패와 관리 부실을 비판한 것이다. 희생자들을 기리는 '16분 침묵'은 전국적 저항운동으로 번졌다.
청년들의 분노는 결국 선거에서 정치적 변화를 이끌어냈다. 로이터의 25일(현지시각) 보도에 따르면, 이날 세르비아에서 치러진 조기 총선에서 학생운동이 지지한 '학생 명단(Students’ List)'이 전체 250석 중 135~140석을 확보할 것으로 전망됐다. 2014년부터 총리와 대통령을 지내며 세르비아 정치를 주도해온 알렉산다르 부치치 대통령은 이날 밤 기자회견에서 "우리가 이번 선거에서 패배했고 학생 명단이 승리했다"며 패배를 인정했다. 이번 선거 투표율은 30여 년 만에 최고치를 기록했다.
승리 소식이 전해지자 수도 베오그라드와 노비사드 등에서는 시민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자동차 경적과 환호성이 울려 퍼졌고, 시민들은 세 손가락을 치켜들며 승리를 자축했다. 세르비아의 전통적인 경례이자 이번 총선에서 '학생 명단' 쪽에 배정된 기호 3번을 뜻하는 동작이다. 부패에 대한 분노를 담았던 붉은 손바닥이 이제 승리를 축하하는 세 손가락으로 바뀐 셈이다. 거리에서 시작된 학생들의 저항이 기성 정치권을 뒤흔든 것이다.
알바니아의 분홍 홍학, 환경운동에서 총리 퇴진 운동으로
발칸반도의 작은 나라 알바니아에서는 '홍학(플라밍고) 혁명'이 벌어졌다. 홍학 서식지인 해안 보호구역의 호화 관광개발에 반대하며 시작된 시위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사위 재러드 쿠슈너와 연계된 고급 리조트 개발사업이 발단이 됐다. 시위대는 분홍색 홍학 모형을 흔들며 "알바니아는 팔리지 않는다(Albania is not for sale)"고 외쳤다. 로이터는 지난 6월4일 수도 티라나에서 수천 명이 거리로 나와 개발사업 중단과 에디 라마 총리의 퇴진을 요구했다고 보도했다.
청년들이 문제 삼은 것은 자연환경 훼손만이 아니었다. 해외 자본을 위한 고급 관광시설이 들어서는 동안 정작 청년들은 취업난과 생활고에 시달리고 있다는 불만이었다. 개발의 이익이 누구에게 돌아가느냐는 의문에 정부 부패와 불공정에 대한 분노까지 더해졌다.
환경보호 운동은 결국 대규모 반정부 시위로 번졌다. 10월 들어 수도 티라나에서는 시위대와 경찰의 격렬한 충돌이 이어졌고, 25일에도 청년들은 에디 라마 총리 집무실을 향해 행진하며 퇴진을 요구했다. 홍학은 이제 자연보호뿐 아니라 개발과 성장의 혜택에서 소외된 청년들의 저항을 상징하고 있다.
스페인·포르투갈·그리스, 집 없는 청년들이 광장에 텐트 펼쳤다
유럽의 유명 관광지가 거대한 텐트촌으로 변하고 있다. 스페인 마드리드의 푸에르타 델 솔 광장에는 수백 개의 텐트가 들어섰다. 지난 9월 87세 여성 마리카르멘 아바스칼이 살던 집에서 강제로 퇴거당한 사건이 도화선이었다. 한 달 가까이 이어진 농성으로 광장에는 식당과 임시 진료소까지 갖춘 작은 마을이 생겨났다. 2011년 경제위기와 불평등에 항의했던 '분노한 사람들(15-M)' 운동의 중심지에 15년 만에 다시 텐트가 들어선 것이다.
주거권 시위는 이웃 나라로 번졌다. 포르투갈 리스본의 호시우 광장에는 100개가 넘는 텐트가 설치됐고, 포르투에서도 시민들이 농성에 나섰다. 25일에는 경찰이 두 도시의 텐트촌을 강제로 철거했다. 그리스 아테네에서는 대학생들이 의회 앞 신타그마 광장에 텐트를 치고 밤을 보냈다.
세 나라 시위의 공통된 원인은 치솟는 주거비다. 로이터의 25일 보도에 따르면 포르투갈의 주택 가격은 2017년 이후 두 배 이상 올랐고, 신규 임대계약의 월세도 거의 두 배로 뛰었다. 시위대는 세입자 보호를 약화하는 법안의 철회를 요구하고 있다. 그리스 대학생들은 비싼 자취방 월세와 기숙사 부족을 호소한다. 한 학생 대표는 35㎡ 남짓한 원룸의 월세조차 400~500유로(약 59만~74만 원)에 달한다고 말했다.
텐트는 주거 불안을 눈앞에 드러내는 저항의 상징이 됐다. 살 집을 구하기 어려운 사람들이 도시 한복판에 임시 거처를 세운 역설적인 풍경이다. 이들이 요구하는 것은 집을 투자 대상이 아니라 살아가기 위한 기본적인 권리로 보장해 달라는 것이다. 열심히 공부하고 일해도 독립할 집조차 마련하기 어려운 현실이 청년들을 거리로 내몰고 있다.
프랑스의 바리케이드, 교육 시위가 대선 쟁점으로
서유럽 프랑스에서는 고등학생들이 쓰레기통과 나무 팔레트로 교문을 막았다. 교사 부족과 과밀 학급, 낡은 학교시설 등 열악한 교육환경에 항의하는 봉쇄 시위다. 9월 파리 외곽에서 시작된 저항은 전국으로 확산돼 10월1일에는 1천 곳 넘는 고등학교에서 시위나 수업 차질이 발생했다.
하지만 학생들의 분노는 학교 울타리 안에 머무르지 않았다. 대학생과 교사, 노동조합 등이 가세하면서 교육환경에 대한 불만은 고물가와 공공서비스 악화, 정부의 정책 전반에 대한 불신으로 번졌다. 학교를 바꿔달라는 요구가 시민들의 삶을 제대로 책임지지 못하는 정부를 향한 항의로 커진 것이다. 24일에는 정부 추산 41만 명이 거리로 나왔다. 이러한 저항은 벨기에와 이탈리아 학생들의 시위에도 영향을 미쳤다.
인도의 바퀴벌레, 조롱을 저항의 상징으로
인도 청년들은 지난 5월 취업하지 못한 일부 청년들을 '바퀴벌레'에 빗댄 대법원장의 발언에 반발해 '바퀴벌레 국민당(CJP)'이라는 정치운동 세력을 만들었다. 대입시험 문제 유출 의혹과 취업난에 대한 불만이 모이면서 온라인의 밈은 거리의 시위로 번졌다.
이후 선거인명부 조작 의혹 등 선거 공정성 문제까지 제기했다. 이달 시위 지도자들이 체포됐다가 법원 명령으로 석방되는 등 갈등이 이어지고 있다. 선거관리 당국은 조작 의혹을 부인하고 있다.
나라마다 분노의 출발점은 다르지만 공통점은 있다. 열심히 공부해도 안정적인 일자리를 구하기 어렵고, 취업해도 독립할 집을 마련하기 힘들며, 공정한 기회조차 보장받지 못한다는 불만이다.
물론 이러한 문제는 Z세대만의 것이 아니다. 고물가와 주거난, 일자리 불안, 기성 정치권에 대한 불신은 세대를 가리지 않는다. 다만 Z세대는 이를 밈과 유머, 기발한 상징으로 표현하며 저항의 새로운 풍경을 만들어내고 있다.
표현은 장난스럽지만 요구는 절박하다. 한국에서 수천km 떨어진 나라들의 청년들이 거리로 나선 이유가 우리에게도 낯설지 않은 까닭이다. 그 분노는 이제 광장을 넘어 기성 정치권까지 흔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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